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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돕는다는 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75] 신영복 선생님 가시는 길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신영복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금요일(1. 15) 밤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고 순간 멈칫하였습니다. 그 일주일 전에 선생님의 건강이 위중하셔서 예정된 동계특강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만 하여도, 그래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끝내 머나먼 길을 가셨네요. 아직은 저희 후학들이 선생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수의 삶을 살다가 1988년 광복절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신 분, 감옥에 있는 동안 엽서나 휴지에 깨알 같이 쓴 글을 모아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셨던 분. - 신영복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먼저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가 내걸린 선생의 분향소

 

저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제가 먼저 선생님의 세계를 접한 것은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책부터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가 구속되어 2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온 사람이, 각종 동양고전을 이렇게 깊이 있게 강의하다니! 그런데 그런 사람의 머리에 담긴 동양고전이 거의 다 20년 감옥 속에서의 책 읽기와 자기 성찰에서 나왔다니!!

저는 신영복 선생님의 깊이 있는 지성에 감화되어 그때부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선생님의 다른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수의 삶을 산 사람의 글이라면 거기서 어떤 이념의 날카로운 주장이 삐져나올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선생님의 글에서는 고난의 저 밑바닥까지 가본 사람의 인생의 성찰과 삶의 지혜가 따뜻하고 부드럽게 스며져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원장으로 있는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에서 개설한 인문공부 과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저도 인문공부 11기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신영복 선생님을 직접 뵐 수 있었고, 선생님의 육성으로 생생한 강의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어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 그 저자를 직접 만나면서는 책에서 받은 감명이 반감하거나 실망하는 경우도 있는데, 선생님을 직접 만나 강의를 듣고 대화를 해보면서는 더욱 선생님의 인품에 감복되었습니다.

 

   
▲ 신영복 선생이 글쓴이에게 써준 붓글씨 <함께 맞는 비>

11기를 수료하는 날, 선생님은 개근한 수료생들 모두에게 정성껏 자신의 서예 작품 하나씩을 써주셨습니다. 저에게는 ‘함께 맞는 비’라는 글씨 옆에 선생님께서 직접 그리신 빗줄기와 우산이 함께 있는 작품을 써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작품에 작은 글씨로 선생님의 책 중에 나오는 글귀를 이렇게 써주셨지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사무실 제 방을 들고나면서 벽에 걸어둔 이 작품을 바라보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곤 합니다.

성공회대에 차를 세우고 선생님 빈소로 향합니다. 빈소에는 이미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이 건물 바깥에까지 줄 서 있습니다. 저도 그 대열의 뒤에 살며시 섭니다. 빈소로 들어가니 여럿이 함께 선생님께 국화꽃을 바치고 묵념을 합니다. 마침내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선생님 앞에 섰습니다. 사진 속에서 선생님은 예의 그 따뜻한 미소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하얀 국화꽃으로 덮인 단에는 선생님의 말씀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가 선생님의 글씨 그대로 붙여져 있습니다.

 

   
▲ 분향소에는 추모의 글을 담은 글들이 걸려잇다.

“선생님! 이젠 이승에서는 뵙고 싶어도 뵈올 수가 없군요. 선생님께서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이 우리에겐 슬픔이지만, 이제 천국에서 고단했던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 감옥이란 고난의 장소로 직접 걸어 들어가, 인생의 지혜를 길어 올리셔서 저희 후학들의 눈을 열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제 책상에는 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록 《담론》이 놓여져 있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강의를 놓게 되면서,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를 모아 작년 4월에 출간된 책입니다. 책에는 단순히 학문적 강의 내용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감옥에서의 체험 등 선생님의 인생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책 속에서 다시 선생님을 만나보렵니다.

 

   
▲ 신영복 선생의 대표적 저서《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