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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마도는 우리땅인데

일본속 우리의 발자취 대마도를 가다

[우리문화신문=조판형기자] 한국관광협동조합(이사장 이정환 ) 주관 행사에 조합원 40여명과 함께 지난 25~26일 1박 2일 일정으로 일본 대마도를 다녀왔다. 25일 새벽 2시 서울 시청 앞을 출발, 부산 국제선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돼지국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곤 대마도를 오가는 오션플라워호를 타고 두어 시간 남짓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대마도의 맨 아래쪽에 자리 잡은 이즈하라항(港)에 도착하여 대마도답사를 시작하였다.

부산에서 쾌속선을 타고 약 1시간이면 닿는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일본 대마도(對馬島)는 이름처럼 말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의 섬이다. 일본말로는 '쓰시마'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겐 대마도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하다. 대마도는 행정구역상 일본 나가사키현에 소속되어 있는데 거리상으로는 부산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 142km로 한국에 훨씬 가깝다.

대마도에 간 우리는 맨 먼저 최익현(崔益鉉, 1833 ~ 1906)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마도로 강제 이송 당한 뒤 그곳에서 순국한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순국비가 우리를 기다린다. 대마도로 끌려가던 당시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며 양쪽 짚신 바닥에 고국의 흙을 한줌씩 담아 신고 갔으며, "일본인이 주는 음식으로 입과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목숨을 거둔 우리의 위대한 선조이다.

 

   
▲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의 혼이 살아있는 수선사

 

   
▲ 최익현선생 순국비

 

또 대마도에는 덕혜옹주의 슬픔도 서려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황실호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우리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를 보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의 슬픔이 우리의 가슴에도 밀려드는 듯했다.

 

   
▲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그러나 대마도는 특히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선조 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한 467명의 사행단(使行團)을 시작으로 1697부터 1811까지 21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한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견줬을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대마도번이 조선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준비와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100만냥(약 5580억)이나 되었다고 한다.

 

   
▲ 조선통신사비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 곧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한다는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1811년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로 이동한 고관들이 묵었던 임시 주택이 있었던 곳이 대마도에 13개가 있다. 마지막 통신사가 역지빙례(易地聘禮)에 의하여 본토에 입국하지 않고 대마도에 머물 때 ‘조선통신사와 막부가 머물렀던 집’이었음을 말하는 막부접우지(비석)는 이즈하라 거리 군데군데 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초조대장경'의 인쇄본과 “백제 은행나무”다. 대마도 장송사(長松寺)에는 있는 고려 현종 때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제작한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 그 앞에는 1,500년 전 백제로부터 전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웅장한 모습으로 여전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 백제의 은행나무

 

대마도 전문여행사인 발해투어 황백현 대표는 "대마도가 과거 고려, 신라, 조선의 영토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다수 남아있다."면서 "대마도 역사문화 여행은 한국-일본 간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제에서 전해진 사실은 지우고 일본의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왜곡한 은행나무를 보면서 왜곡에 능통한 일본인들에게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곳곳에 있는 신사가 여기라도 없을 수 없다. 이곳 와타즈미 신사는 대마도의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해신(海神)신사로 다섯 개의 문(도리이)이 차례로 바다를 향해 들어가고 있다. 조수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고, 밀물 때는 2m정도가 바닷물에 잠겨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이승과 저승 ,바다와 신사를 연결해 주며 다섯 개의 탐욕을 뜻하기도 한다.

 

   
▲ 와타즈미 신사

 

   
▲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360도 동서남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대마도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에보시다케 전망대에 올라본다. 아소만의 겹겹의 산과 바다 위의 작은 섬들과 리아시스식 해변 등 웅대한 모습을 조망할 수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우리나라 부산과 거제도를 볼 수 있다.

대마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러일전쟁을 대비해 구)일본 해군의 군함 출입을 위해 인공운하를 만들면서 두 개의 섬이 되었다. 대마도에 거주했던 많은 선조들이 운하건설에 투입되어 사망하였다니 숙연할 뿐이다. 지금은 대교를 건설해 상대마, 하대마를 연결하고 있다.

 

   
▲ 한국전망대

 

이곳에는 한국전망대도 있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전망대로 날씨가 좋은날에는 거제나 부산까지 볼 수 있으며 1997년에 세워진 팔각정은 서울 탑골공원을 모티브로 만든 정자라고 한다.

대마도에는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선에 뽑힌 대마도의 자랑거리 미우다 해수욕장도 있다. 매우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사장과 비취빛 바다물결은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며 동남아시아와도 견줄 만한 아름다운 해변이다. 아담하고 조용하면서도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 피서지로 유명하다.

 

   
▲ 미우다 해수욕장

 

   
▲ 이즈하라시내

 

지리적으로 볼 때 대마도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와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 분명하며 대마도에 우리 조상의 숨결이 가득하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마도는 역사적ㆍ지리적ㆍ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임이 분명하다. 왜놈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대마도를 지키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차라리 이쯤해서 대마도는 우리땅이라고 역공격을 해보면 어떨까?

대마도를 여행하면서 나는 여러 가지 참작한 심경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마도는 우리땅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