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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뫼’와 ‘갓’

[우리말은 서럽다 25]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말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이라는 손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이 흐릿하면 세상도 흐릿하게 보인다. 천수관음보살처럼 손이 즈믄(천)이면 세상도 즈믄을 받아들이지만, 사람처럼 손이 둘뿐이면 세상도 둘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에서 중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얼마든지 끌어다 써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토박이말로는 눈과 손이 모자라서 지난날 중국 한자말로 눈과 손을 늘렸다고 여긴다. 그 덕분에 이름씨 낱말이 얼마나 넉넉하게 되었는지는 국어사전을 펼쳐 보면 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참말이 아니고 옳은말도 아니다. 

‘산’은 마치 토박이말처럼 쓰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끌어다 쓰기 전에는 우리에게 ‘산’을 뜻하는 이름씨 낱말이 없었을까? 이것이 들어와서 비로소 ‘산’을 뜻하는 낱말이 생겨나 우리가 산을 처음 바라보고 세상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사실은 거꾸로다. ‘산’ 하나가 들어와서 이미 있던 토박이 이름씨 낱말 셋을 잡아먹었다. 

‘뫼’와 ‘갓’과 ‘재’가 모두 ‘산’에게 잡아먹혀 사라져 버린 우리 토박이말들이다. ‘산’이 들어와 설치기 이전에는 ‘뫼’와 ‘갓’과 ‘재’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담고 쓰였으나, 오늘 우리는 이들 세 낱말에 나누어 쓰던 뜻을 온통 ‘산’ 하나에 담아 쓰고 있는 것이다. 

 

   
▲ 한자말 산(山)이 들어와서 우리말 뫼와 갓 그리고 재를 짓밟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갓’은 집을 짓거나 연장을 만들거나 보를 막을 적에 쓰려고 일부러 나무를 가꾸는 뫼를 뜻한다. ‘갓’은 나무를 써야 할 때가 아니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오가면서 늘 지키면서 가꾼다. ‘갓’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일부러 ‘갓지기’를 세워 그에게 맡겨서 지키게 한다. ‘갓’은 소리로나 글자로나 머리에 쓰는 ‘갓’과 헷갈리니까 ‘묏갓’이라 하다가 요즘 국어사전에는 아주 ‘멧갓’으로 올려놓았다. 

‘재’는 마을 뒤를 둘러 감싸고 있는 뫼를 뜻한다. 마을 뒤를 둘러 감싸고 있기에 날마다 오르내리며 밭도 만들고 과수원도 만들어 삶터로 삼는다. 잿마루로 길을 내어 넘나들며 재 너머 마을과도 어우러져 살아간다. 난리라도 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잿마루로 올라가서 먼 곳까지 내려다보며 마을을 지키고 살 길을 찾는다. 그래서 한자 ‘城(성)’의 우리말 풀이가 바로 ‘재’다. ‘뫼’는 이들 ‘갓’과 ‘재’를 싸잡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높고 커다란 것을 뜻한다. 

한자말 ‘산’이 들어와서 보탠 것은 없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세상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던 눈과 손 셋을 없애 버렸을 뿐임을 환히 알겠다. 그러나 이들 세 낱말을 짓밟아 없애기에 앞서 한자말 ‘산’은 소리가 비슷한 우리 토박이말 ‘턣’을 먼저 짓밟아 죽였다. ‘턣’은 ‘젊고 씩씩한 남자’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쓰던 말이었으나, 임진왜란 뒤로는 글자에 적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것이 일찍이 살아 있었다는 자취는 오늘까지도 남아 있으니 ‘사나이(사내)’가 바로 그런 자취다. ‘사나이’는 ‘산’과 ‘아이’로 갈라지는 낱말이니 본디는 [턣+아퍥], 곧 ‘아직 어린 남자’라는 뜻의 낱말이었던 것이다.

세상 어떤 겨레도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들 토박이말로만 살지는 못한다. 사람은 갇혀 사는 존재가 아니라 멀리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말과 삶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말을 함부로 받아들이면 더불어 살아가는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음에 헷갈림과 헝클어짐이 생길 뿐 아니라 토박이말을 짓밟아 죽이기도 한다. 남의 말은 깊이 헤아려서 토박이말의 모자람을 보태고 살찌우도록 조심스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슬기로운 겨레의 말살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