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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포항 오어사에서 원효를 만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통일이전 신라 지역인 이곳 포항에는 600년대 지어진 오어사(吾魚寺)가 있다 이 절은 당시에는 항사사(항沙寺)라 했다고 한다.  항사사라 불리던 시절에 이곳 계곡에서 원효스님과 혜공스님이 자신들이 터득한 법력을 서로 자랑하기 위하여  누가 죽은 물고기를 살릴 수 있는지 내기를 했다고 한다. 두 스님은 죽은 2마리 물고기를 계곡에 넣었는데,  한 마리는 그냥 그대로 죽은채 있었고, 신기하게도 한 마리는 힘차게 살아서 헤엄쳐 갔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본 두 스님은 죽은 물고기는 상대방 물고기이고, 살아난 물고기가 자신이 살린 물고기라고 서로 외쳤다.  "저게 내 물고기다" 그 사연이 오늘의 절이름으로 지어져 오어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 때문에 절의 이름도 특이하지만 그 이야기도 또한  재미있다.


 불가에서 육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고기속에 들어있는 영양분의 필요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같이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다른 동물을 자신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죽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더 의미를 확장해보면, 태어난 모든 존재는 살고자 하는 욕망속에 살아가는 것인데, 아무리 미물이라 하더라도 그 미물조차도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여 자신의 식욕을 충족하기 위하여 타동물의 삶을 해쳐가면서 살지는 말라는 것이고, 또 가능만 하다면 죽은 동물도 살릴 수만 있다면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스님이 살았던 서기 600년대 당시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당시 한반도 지역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같은 조상을 섬기면서도 나라는 갈라져서 치열하게 세력다툼을 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동족이되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는 형제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서로가 자기 만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상대방의 땅을 뺏고 사람을 뺏고 죽이면서 피비린내 물씬 풍기면서 살았다.


그러니 동족이되 서로는 남보다도 더 미웠을 것이다. 아마도 현재로 친다면 북한의 김정은을 대하듯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통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악한 나라가 다름 아닌 북한이라는 인식을 하고서 통일을 이야기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삼국이 치열하게 싸울 때, 모두가 자신 위주의 통일만이 통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우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삼국은 서로 더 악한 나라를 응징하기 위하여 힘이 약한 나라끼리 동맹을 맺기도 하고 또 그 동맹을 깨서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 신라는 동족은 아니지만,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이민족국가인 당나라와 손을 잡고 동족의 나라로 진격하여 통일을 하였다.


그러나 북쪽 지역에서는 곧바로 발해가 들어섰으니, 결국 신라는 백제지역만을 차지한 것으로 통일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수십년 피비린내 끝에 전쟁으로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이룩한 통일은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중에 백제지역의 사람들은 그 이전에 아무리 고관 대작이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피 지배자의 신분이 되어서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신라에 동화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를 견디다 못한 많은 백제지역의 지배층은 일본으로 대거 귀화하였고, 그렇게도 하지 못하는 힘업고 재력이 없는 사람들만이 충청 전라지역에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백제유민들을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통일된 신라에서는 그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동화정책이 반듯이 필요하였다. 이 때 나타난 사상이 바로 당시 중국에서도 치열한 전쟁상황에서  크게 빛을 발하였던 불교의 화엄사상이고, 이를 통일신라에 도입한 스님이 한국의 훌륭한 고승인 원효스님 의상스님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그 화엄사상을 공부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자 하였다. 둘은 백제지역 서해안 당으로 향하는 포구인 당진에서 배를 타기 위하여 노숙을 하던 중,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비바람과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 비바람을 피하기 좋은 토굴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 때 토굴 안쪽 옆에는 누가 두고간 것인지는 몰라도 바가지가 하나 있었고, 그 바가지에는 마시기에도 적당한 물까지 있어 잠결에 깨어나  갈증난 목을 축여주기에 너무도 달고 맛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깨어서 보니 그곳은 토굴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무덤속 이었고, 그 무덤은 비바람에 파헤쳐지고 바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해골이었으며 달고 맛있게 마신 물은 다름 아닌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던 것이다.

 

지난 밤에 느끼기에 아늑한 토굴, 바가지, 달고 맛있던 물이, 깨어보니 무덤, 해골, 해골물임을 알고 원효는 지난 밤에 마신 해골물을 토하고자 별짓을 다했으나, 그러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큰 고뇌에 빠지게 되었고, 그 고뇌속에 부처님의 경전과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스스로 크게 깨달음을 얻어,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나려던 유학계획을 접어버렸다.


의상스님은 그런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뇌 보다는 큰 스님이 가르침을 전해주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당시 중국의 화엄종의 종주였던 종남산에서 화엄종의 초조인 지엄화상으로부터 법을 전해받고 화엄종의 전법제자가 되었고,  돌아와 신라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로 떠나지 않은 원효는 화엄종을 스스로 터득하여 토종 화엄종의 큰스님이 되었다.

 

중국에서 화엄종을 받아 들어온 의상은 전국의 명당을 찾아 부석사, 낙산사등 큰 절을 짓고, 당시 귀족과 왕실로부터 추앙을 받는 큰 스님으로 활양하였지만, 원효는 신라에서 갖은 기행과 만행을 행하면서 당시 스님들과 신라정부에서는 이단적인 행동으로 많은 돌출행동을 하기도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깨달은 화엄의 세계와 화엄경의 내용을 수많은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전하는 원효스님이 지으신 명저로는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경전을 설법하고 주를 단 책이 전하고 있다.

 

'싸움으로 이긴자는 교만하기 쉽고 진자는 비굴하기 쉽다'는 것은 동서 고금 변할 수 없는 중생계의 진리이다. 하지만 통일된 나라에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면, 그런 생각으로는 도저히 한 나라안에서 화합하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원효스님은  이긴 신라인이나 진 백제인들이 통일 신라에서 한 백성들의 화합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화엄사상에 의한 불교사상으로의 사상적 통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야만 이긴자의 교만을 잠재우고 진자의 비굴함도 감쌀 수 있다고 깨달은 것이고, 이를 부단히 실천한 것이다.

 

당시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만의 대찰을 찾아 설법듣고 기도하면서 복을 구하는 고매한 종교였으나, 이를 넘어서기 위하여는 전 국민이 불교의 화엄사상 안에서 융합 할 수 있도록 민중속으로 불교를 확산하기 위하여,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운 경전을 위주로하던 것을 타파하고 글을 모르는 무식한 백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진심을 다하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을 하여도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무리 무식한 민중이라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애행(거리낌이 없는 행동)을 행하였고, 보통사람은 감히 엄두도 못낼 행동을 하면서 다니다가, 당시 왕족이었으나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모종의 계기를 만들어 그녀에세서 신라시대 유학의 대 스승인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한국 유학의 태두로 문묘에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윗자리에 자리한 유학자이다. 이처럼 무애행을 행하던 1400년 전 원효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포항 오어사에 들러보니, 이곳에는 그가 남긴 이야기 외에도 그가 쓰고 다녔다던 삿갓이 유물전시관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혹자들은 말한다. 저게 과연 원효스님이 정말로 쓰시던 삿갓일까?

 

그 진실이야 내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고래로부터 전해지고 믿어오는 것을 의심한다고 그 의심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의심으로 인하여 그 의미조차 훼손될 것이 분명할 뿐이다. 오어사의 보물로 전하는 다 헤어진 원효스님의 삿갓을 보면서 그런 의심의 보따리를 풀기보다는 이시대 분단된 한국의 통일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남북이 한 민족으로 미래를 함께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것도 전쟁이 아닌 평화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고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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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