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곤지암 전설과 신립장군 이야기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63호 곤지암, 연못도 복원할 계획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8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곤지암 나들목을 지나게 되지요? 그래서 서울 시민치고 곤지암을 모르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곤지암이라고 하니,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곤지암이라고 하여 동네 절 이름이 지명이 되었나?”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곤지암이라는 절은 없더군요.

 

그럼 왜 지명이 곤지암일까요? 곤지암에는 곤지암(昆池岩)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바위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 이 바위가 특별한 바위라는 것이겠지요? 얼마 전에 곤지암을 지나며 일부러 그 바위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길 찾기 앱을 켜고 이를 보면서 다가가니, 시내 한 복판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가게와 집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큰 바위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바위에 꽂히듯이 박혀 있습니다. 400년 된 나무라는데, 향나무가 척박한 바위틈에서 싹을 내어 저 정도로 크려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가졌을까요? 향나무가 좁은 바위틈에서 몸집을 불리며 바위를 쪼개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관심을 끌만한 바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내문을 보니 원래 고양이처럼 생겨 묘()바위로 불리던 곤지바위는 하나의 바위였는데, 윗부분이 떨어져 나온 것이네요.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신립 장군 사연이 있습니다. 신립 장군이 순국한 뒤 장례를 치르면서 신립 장군의 묘를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씁니다. 그런데 그 후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 바위 앞을 지나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여,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려 걸어가곤 했답니다.

 

그 어느 날에도 한 선비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이런 경우를 당하자, 선비는 사태를 짐작하고 말에서 내려 바위를 향해 호통을 칩니다. “장군의 원통함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고한 행인들에게 불편함을 끼쳐서야 되겠느냐!” 그러자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이 바위에 떨어져, 바위 윗부분이 땅으로 떨어졌고, 그 옆에 조그만 연못도 생겼습니다. 그 후로는 말을 탄 행인들은 자유롭게 이 앞을 지나다닐 수 있게 되었구요.

 

설마 장군의 원혼 때문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나라를 위해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끝내는 강물에 몸을 던진 신립 장군의 애통함을 백성들도 그대로 느끼면서 이런 전설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름에 왜 못 ()’자가 들어갔을까 했더니, 벼락이 떨어지며 연못이 생겼기 때문이군요. 그런데 지금은 연못은 모두 메워졌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런 내용의 전설이 생겼을까요? 당시 일반 백성들이 말을 타고 다니진 못했을 테고, 말을 타고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주로 양반이었겠지요? 백성들로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던진 신립 장군이 이 근처에 잠들어 있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말을 타고 여기를 지나다닐 수 있느냐?’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그런 마음이 이런 전설을 만들어내고요. 현재 이 곤지암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광주시에서는 조만간 없어진 연못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런 전설을 만들어낸 신립 장군의 묘소에도 가봅니다. 신립 장군 묘소는 곤지바위에서는 직선거리로 약 800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신립 장군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던 장군! 처한 상황에서 비겁하지 않고 목숨을 바쳤던 장군의 기개에 경의를 표합니다. 허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왜 전략적으로 훨씬 중요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신 건가요? 어차피 당시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문경새재나 탄금대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보신 것인가요?”

 

묘역에서 보니 신립 장군의 무덤은 곤지바위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립 장군은 여기서 곤지바위를 바라보다가, 말 타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혼내준 것인가? 이제 신립 장군의 묘소를 떠나 원래 예정했던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 동안 말로만 듣던 곤지암과 신립 장군 묘소를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뿌듯합니다. 답사의 묘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곤지암을 지나갈 때면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