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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을 잡아가라 했던 용성스님

종로 3가역 근처 대각사와 용성스님에 얽힌 이야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81]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하철 종로3가역 7번 출구로 나오면 직선거리로 100m쯤 떨어져 종묘 담장 쪽으로 대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아마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아니? 종로에 조계사 말고 또 대각사라는 절이 있었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각사? 샤머니즘과 결합된 그저 그렇고 그런 절이겠지하시던가요. 그러나 대각사는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이 1911년 창건한 의미 있는 절입니다. 얼마 전에 이윤옥 시인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에 갔다가 근처 대각사에도 가보았습니다.

 

용성스님(1864~1940)16살 때인 1879년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하였는데,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우리 겨레를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 구제이고, 그를 위해 불교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여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1911년 대각사를 창건합니다. 대각(大覺)이니까 큰 깨달음이란 말씀이네요. 용성스님으로서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크나큰 사고의 전환,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총독부에 연락하여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하였다지 않습니까? 알고 봤더니, 그 때 그렇게 총독부에 연락한 사람은 용성스님 제자 동헌스님이라네요. 용성스님이 시키신 것이지요. 그 때 용성스님은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헤어지면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33인의 두루마기와 신발을 감추고는 제자에게 신고하도록 하였다는군요.

 

그 뒤 31 만세운동으로 16개월의 형을 복역하고 나온 용성스님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고는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을 펼칩니다. 그리고 불교 대중화를 위해 각종 포교서를 저술하고요.

 

또한 용성스님은 선농일치(禪農一致) 운동을 벌여, 1922년에는 만주 연길의 평원촌과 봉녕촌에 농지를 마련하고 선농당을 설립하여 만주에서 유랑걸식하던 동포들을 불러 모으고, 잉여 농산물은 독립군 식량으로 썼습니다. 그에 더하여 용성스님은 경남 함양에서는 임야를 구입하여 화과원(華果圓)을 열어 수 만 그루의 과일나무를 심고 선농일치 운동을 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을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1924년부터는 불일(佛日)이라는 불교 잡지를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로 일요 불교학교를 열어 어린이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교 의식과 염불을 우리말로 하고, 쉽게 부를 수 있는 찬불가도 직접 작사, 작곡하고 어린이 포교를 시작하여 손수 풍금을 연주하는 등 그야말로 불교 대중화와 민족 계몽운동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런 용성스님이 조선총독부에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요? 일제는 1931년 대각사를 아예 몰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교 대중화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용성스님은 끝내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21일에 열반하셨습니다. 일제는 다비식마저 철저히 방해하고 참석하는 사람들을 수색하고 검열하여 다비식에는 제자 몇 분만이 참석하였다는군요.


 

대각사 앞에 섰습니다. 바짝 다가선 콘크리트 건물들에 위협당하며 마당도 없이 몇 채의 전각만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는 대각사에선 어느 깊은 산속의 절에 왔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안온함은 느낄 수 없군요. 안내문을 보니 백범 김구 선생은 광복 뒤 귀국한지 한 달도 안 된 19451212일 대각사를 찾아오셨군요. 백범은 상해로 망명하기 전 서울에 오면 용성스님을 찾아뵙곤 하였답니다. 백범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에는 용성스님이 독립자금을 보내기도하구요. 그런 인연으로 백범은 용성스님이 이미 열반하셨음에도 대각사를 찾아오신 거였습니다.

 

용성스님은 가셨지만 큰 깨달음을 구하는 용성스님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제자들에게 이어집니다. 1969년에는 완규, 동헌을 비롯한 용성스님의 제자들이 스님의 대각교 창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재단법인 대각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해마다 용성스님 나신 날에는 용성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는 기념식과 학술제 등이 열리고 있습니다.

 

발길을 돌리기 전 다시 한 번 대각사를 바라봅니다. 큰 깨달음을 얻으려는 용성스님의 염원이 담긴 대각사, 앞으로도 대각사가 용성스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사회에 큰 깨달음을 전파하는 구심점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