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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중국땅에서 초등학교를 다섯번이나 옮겨다녀야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1] –김자동 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시집을 6권이나 낸 이윤옥 기자가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 나선다. 항일독립운동가 본인들은 물론 후손 1세대들도 고령으로 살아계신 분이 별로 없는 이때 후손 1세대들을 찾아 항일독립운동에 온 삶을 바친 선조들을 두었던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제나마 항일독립운동가 후손의 고난에 찬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삼으면 좋을 일이다.(편집자 말)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 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자연처럼 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요 뜻이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범부, 졸부가 뭐 남길게 있다고 붓을 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다시 물렸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어머니 정정화 여사의 자서전인 장강일기, 학민사머리말 가운데 한 부분이다.

 

어머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라고 기다렸다는 듯 김 회장은 대답했다.


 

독립운동가 1세들이 세상을 뜨고 이제 그 후손 분들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연세가 높아져가고 있어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취재하고 싶은 마음이 벌써부터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첫 번 후손으로 만나 뵌 분이 김자동 회장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이기도 한 기자는 가끔 태평로 사조빌딩에 세 들어 있는 임시정부 사무실에 들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멋진 넥타이를 맨 김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나이가 까마득한 아랫사람인데도 김 회장은 언제나 미소 띈 모습으로 기자를 반겨주는 모습이 친정 아버님을 뵙는 듯 정겹기만 하다.





차 한 잔을 나누고 첫 번째 던진 질문이 어머니 정정화(鄭靖和,1900~1991) 여사에 관한 것이었는데 김 회장은, ‘나대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평생을 조용히 남을 위해 살아 온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을 실타래를 풀 듯 풀어냈다. 기자 자신이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기록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첫 질문을 어머니 정정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여사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충칭 가까이에 있는 토교에서의 생활은 임시정부의 피난 길 가운데 약간은 안정이 된 셈이었으나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당시 토교에 모인 동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집안 식구들처럼 지냈습니다. 특히 오희옥 여사의 집안과는 각별했지요.” 김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오희옥(1926~생존) 여사란 생존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로 김자동 회장과 어린 시절 토교의 청화중학교에 함께 다닌 동기생을 말한다. 기자 역시 몇 해 전 임시정부 27년 피난길 답사시에 청화중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어 이야기는 자연스레 청화중학교 시절로 옮겨갔고 곧 이어서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중국에서 초등학교(소학교)를 무려 다섯 군데나 다녔지요. 풍성, 무령, 남경, 불산, 기강 이렇게 돌아다니고서야 소학교(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 무려 다섯 번이나 전학을 다녀야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국땅에서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다. 김 회장은 책상 위에 두툼한 중국 지도를 펼쳐 보이며 다섯 번이나 옮겨 다닌 학교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 주었다. 김 회장의 연세가 88세이고 보면 중국에서의 소학교시절은 무려 8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도중에 튀어 나오는 사람 이름이라든지 지명, 연도별 행적 등 어느 것 하나 기억에서 놓치지 않고 정확한 자료를 읽어 주듯 찬찬히 중국에서의 체험을 들려주었다.

 

임시정부 가족 일행은 193944일 버스 다섯 대에 나눠 타고 광시성의 류저우(유주)를 출발해 충칭(중경)으로 갔지요. 내 나이 겨우 12살에 중국 창장(장강) 이남의 넓은 지역을 두루 여행한 셈이지요. 7살 이전에 상하이(상해), 자싱(가흥) 등에서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지만 그 후 5년 남짓 동안의 여정은 또렷이 기억납니다.” 김 회장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우리 가족은 창사(장사)에서 7월까지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지낸 5개월 동안 같은 핏줄의 한국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우리끼리도 보통 중국말을 하고 지냈지만 과거에 사귀었던 중국 아이들과 다른 친근감을 느낄 수 있거든요. 창사에서 머물면서 중국 소학교에 다녔는데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임시학교를 개설하여 10여명의 아이들에게 국어와 우리노래 등을 가르쳤지요. 그때 교장 선생님은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한 이달 선생님이었고 송면수, 김효숙 내외분이 국사와 국어를 가르쳐주었어요. 노래와 춤은 김철 선생님이 맡았는데 그때 배운 노래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임시정부가 충칭에 이르기까지 여러 도시를 전전하던 모습을 설명하면서 중국 지도에 방점을 찍어 보였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국땅으로 돌아간 듯 김 회장이 손에 든 연필은 깨알 같이 적혀 있는 중국 지도 위를 날아다녔다. 기자는 지도 위에 눈길을 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12살 어린 소년이 나라 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김자동 회장의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金嘉鎭,1846~1922)은 구한말 개화파 학자로 1894년 갑오경장 때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기초하고, 농상공·법무대신 등을 지낸 분이다. 동농은 을사늑약 이후 <대한민보>를 발행하여 일진회와 맞섰으며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항일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대동단은 31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서울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조직으로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의 자유 발전을 광박(廣博)할 것이라는 3대 강령을 채택하여 전협을 단장으로, 동농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김 회장의 아버지 성엄 김의한(金毅漢, 1900~ 납북) 역시 할아버지와 함께 19191010일 조선을 빠져나가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는데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재정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등을 지냈다. 어머니 정정화 여사는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일컬어질 만큼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분으로 삼엄한 왜경의 감시 하에 국내를 드나들며 독립자금 모집에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어려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해낸 분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1946년 열아홉의 나이로 조국에 발을 디딘 김자동 회장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여 법학공부를 했고 이후 <조선일보> 공채 1기를 거쳐, 4·19 학생혁명 이후 창간된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 사장이 불과 31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언론계를 떠났다. 그러다가 1997년 민주화 시대를 맞아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뛴 결과 20061128일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민족일보 사건은 감금·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밝혀내었고 2008116일 법원은 이 사건의 재심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일제에 국권을 잃고 중국땅을 전전하다 광복을 맞았고, 해방된 조국에서의 삶 역시 녹녹치 않았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김 회장의 일생은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은 김 회장의 자서전이자 임시정부의 산 역사서로 가족의 중국망명과 192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야기, 중국 내 북벌, 내전과 시안사변, 임시정부 피난시절, 광복군과 2차세계대전, 해방직전의 충칭생활과 국제정세, 일본의 항복과 임시정부의 귀국에 얽힌 이야기들로 이뤄져 있다.



 

여든 여덟 나이의 필자.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나이이고 늙은 몸뚱아리지만 아직까지 정신 하나만은 칠흑의 밤 압록강에 거룻배를 띄우고 대륙의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 위에서 목선 난간에 기대어 있을 적과 한 치의 다름이 없다. 이 나라 격변기 역사의 한 줄기를 국외자가 아니라 바로 그 현장, 그때 그곳에서 참여자로 지켜보고 이끌어온 이 사람이 역사 앞에 서서 침묵으로 대변하는 말마디 속에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너무나 많은 역사의 찌꺼기 들이 들어 있다. 그 소중한 찌꺼기들은 아무나 골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김자동 회장의 어머니 정정화 여사가 88세 때 장강일기에서 한 말이다. 어느 사이 김 회장도 어머니의 나이를 넘어섰다. 어머니와 임시정부 가족이 목선을 타고 그 말 못할 고생을 하셨다는데 사실 나는 그때 너무 어렸기에 뱃전에서 신나게 뛰고 놀았지요 그 천진난만한 어린 꼬마는 이제 구순을 앞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앞서 김 회장은 그의 나이 일흔 후반인 2004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조명하고 기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사업회는 번듯한 기념관 하나 없이 셋집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없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기자가 김자동 회장을 만난 22일(수)은 마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회장 이종찬), 푸른역사 출판사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위한 스토리펀딩(김형민 선생 집필)’1억원을 돌파한 날이라고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이 돈은 기념관 신축을 위해서는 어림없는 금액이지만 전국에서 십시일반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위한 마음이 답지한 것을 보고 김 회장은 스토리펀딩에 참여해준 모든 국민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했다.

 

모쪼록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 증인인 김 회장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2019년 완공 목표인 임시정부 청사 개관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우리 곁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