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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우린 고아원에 맡겨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2] –김정륙 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덥고 습기 많은 충칭 특유의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손가화원에서는 난데없이 어른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이지요. 귀국을 서두르는 우리에게 정든 친구 천진천, 천의, 짱다루, 구팡 등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해코지를 일삼던 애들까지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어디서 난 소문인지는 몰라도 차우센미(조선쌀)는 한 알이 달걀만해서 서너 알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도 좋다며 애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가이자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金尙德, 1891 ~ 1956) 선생의 아드님인 김정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의 소회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참말인줄 알고 귀국했다가 그만 첫날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륙 부회장의 나이 8살 때 일이니 조국의 정보란 것이 얼마나 엉성했을까 싶다. 하지만 푸석푸석하고 바람에 날리는 쓰촨(四川) 쌀에 견주면 우리나라 쌀은 정말 찰지고 맛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그것도 망명땅 중국에서의 쌀밥 한 그릇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을까? 물자가 풍부한 오늘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김정륙 부회장을 만나기로 한 날(927, 화요일)은 가을비가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어 다소 쌀쌀한 느낌을 주었다. 오후 2시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은 부회장의 자리가 따로 없어 김정륙 부회장은 김자동 회장 방에서 담소하며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나누고 자리를 옮겨 앉자마자 김 부회장의 이야기보따리는 술술 풀려 나갔다.

 

 

기자는 대담 전에 김정륙 부회장의 아버지인 김상덕 선생의 김상덕 평전, 김삼웅 지음을 숙독했을 뿐더러 최근에 발간된 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만든 백년편지에 실린 김 부회장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고 갔던 터라 어느 대목을 이야기하는 지 머릿속에 한 장면 한 정면을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임시정부의 피난길을 직접 돌아보았던 기자에게 김 부회장의 충칭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더욱 실감이 났다.

 

"하늘이 허락하는 천수에 가까워가면서도 저는 어머니 품을 그지없이 그리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릴 적 민혁당 대가족이 모여 사는 손가화원에서 누구보다도 힘들게 어린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우리 남매는 어머니의 품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머니 가신지 채 한 해도 버티지 못하고 막내 영이가 따라간 것도 이 탓입니다. 막내를 애장하고 돌아온 아버지께서 그길로 기약할 수 없는 어린 남매를 지키기 위해 고아원에 맡겨버렸지요

 

 

김정륙 부회장의 말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시울도 붉어지는 듯했다. 김 부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팔순의 나이에도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고난에 가득찬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기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아마 우리 남매를 고아원에 맡기는 날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을지 어린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지요. 배고픔에 시달리던 때라 그런지 유달리 그날 아침 밥상이 잊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서 구해와 차렸는지 평소에 보지 못하던 반찬이 상에 올랐습니다. 누나와 나는 신나게 먹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양자강가를 걸었습니다. 그곳은 평소 아버지가 우리들 옷가지를 빨던 곳으로 우리 남매는 아무런 생각없이 아버지를 따라나섰지만 그 길이 고아원으로 가는 길임을 몰랐던 것이지요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맡았던 아버지는 39살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하여 당시 9, 7, 3살인 아이들을 홀로 돌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머니를 여의고 6개월 뒤, 겨우 세 살배기 막내 여동생이 영양실조로 숨지자 김정륙 부회장은 누나와 함께 이국땅의 고아원에 맡겨진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 온몸으로 겪은 김 부회장의 증언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들이 겪은 고난과 역경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겨레가 겪은 일이라서 일 것이다. 고아원 생활은 2년 간 이어졌다. 김정륙 부회장이 학령기가 되어 학교를 다녀야하는 관계로 아버지와의 재회가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 김상덕은 임시정부의 문화정책 책임자로 특히 동포자녀의 한글교육에 열중하였다. 일제 패망 뒤에 동포 2세들이 겪어야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고통을 염두에 둔 처사였다.

 

“1945년 봄 개학이 되자 민혁당에서는 학교에 교섭해 일요교실을 마련하여 어린이들에게 한글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일제의 패망을 내다본 임시정부가 제나라 말과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한글교육을 서두른 것이지요. 한글 교실은 처음 보는 이상한 글자와 처음 듣는 이상한 발음소리에 여기저기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러나 교육을 맡은 윤기섭 선생은 주말에 한글을 배우러 나온 것만도 기특해 귀엽게 봐주셨지요이때 한글을 배우지 않았다면 조국에 돌아와서 꽤 어려움을 겼었을 것이라고 김 부회장은 귀띔한다.

 

꿈에도 바라던 조국의 광복, 여덟 살의 김정륙 부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고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포함하여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고난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미군정에 이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사이비 민족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환경을 만들어버렸고 그 통에 진짜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은 떠돌이로 나돌던 이국땅에서의 삶보다 못한 세월을 견뎌내야 했으니 이것은 아버지 김상덕의 비극이 아들로 고스란히 대물림되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김 부회장의 아버지 김상덕 선생은 194511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임정요인과 함께 귀국하여 19462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과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을 지냈다. 19485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이어 1949년 이인, 곽상훈 등과 반민특위를 구성,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아버지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이었을까?

 

정상적인 나라라면 일체침략기에 동포에게 총을 겨눈 반일분자들을 발본색원하여 벌주는 일에 합심을 해야 할 텐데 김상덕 선생이 중심이 된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훼방으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되레 친일파들로부터 빨갱이로 내몰려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으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는 일이다. 사이비 언론들은 신문을 통해 연일 국가안보를 해치는 빨갱이들을 처단하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특위 요인들을 암살하고자 기도했으며 암살대상 1호는 김정륙 부회장의 아버지 김상덕 위원장이었다.

 

이승만은 김상덕 위원장이 임시 거처하는 관사로 은밀히 찾아와 자신의 심복들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면서 협력하면 입각을 고려하겠다는 둥 온갖 회유책을 썼으나 김 부회장의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에게 독립정신을 기억하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악랄한 보복이 감행되었다.


친일파 청산의 지주이던 김구 선생이 암살되고 반민특위는 경찰의 폭력으로 짓밟혔으며 반민법 제정과 외국군 철수 운동에 앞장섰던 진보적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줄줄이 체포되었다.  그런 와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김상덕 위원장은 그만 납북되고 말았다.


김정륙 부회장의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삶을 돌아보면 191928독립선언-임시정부-의열단-만주무장투쟁-민족혁명당-임시정부 복귀-귀국하여 반민특위위원장-납북에서 보듯이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느 한 시기 평온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은 아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삶이 고달할진대 아들의 삶이 평탄했을 리가 없다. 부자지간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험한 고통의 시간은 끝모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고아아닌 고아의 삶을 살다가 해방된 조국에서 아버지와 행복한 삶을 살아보나 했더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납북되어 버려 13살의 김 부회장 남매는 또 다시 고아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다. 천애의 고아 신세로 어렵게 대학 공부를 마치고 나서 이제는 좀 살만한 가 했더니 또 다시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연좌제였다. 아버지의 납북으로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던 연좌제는 1996년에서야 풀렸다. 그의 나이 56살이었다. 아버지의 복권으로 연좌죄의 너울은 벗겨지고 신원증명서의 붉은 선은 사라졌지만 취업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꿈 많던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은 것은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대담 내내 김정륙 부회장의 얼굴을 바라보기조차 송구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의 청춘을 보상하며 누가 그 불행한 가족사를 올바르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용한 전원으로 가서 아담한 정원을 가꿔 아내가 사랑하던 진달래 동산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영혼의 쉼터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국땅에서 숨져 유골 수습도 못한 채 어머니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가져온 흙과 어린 나이에 숨져간 동생 영이의 영혼까지 모두 한곳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지금 당장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제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김 부회장의 말끝이 흐려졌다.



 

침략의 역사는 끝이 났지만 한 가정의 역사는 아직도 아픔의 역사로 진행형이다. 한 시간 동안 팔십 성상의 세월을 말해달라는 것은 기자인 내가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갖는다고해서 더 색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살아온 세월은 어느 한순간도 평온하지 못했으며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실패한 삶은 아니다.


어쩌면 친일로 얻은 천박한 부귀영화보다는 비록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당당한 삶을 산 아버지를 둔 김정륙 부회장의 삶이 더 값진 삶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김 부회장의 소박한 꿈이 하루속히 이뤄지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