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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100년 편지. 251 ] 양우조, 최선화 선생님께 -이지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한 이지은입니다. 뛰어난 글솜씨를 지니지 못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들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께 제 마음만은 꾹꾹 눌러 이 편지 속에 담아 글을 써내려가 봅니다.

 

제가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이후로 항상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했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시의 선생님들께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서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으셨을까?

 

그 마음을 모두 다 헤아려보기엔 저는 한국인이라고 차별을 받아본 적도, 매일매일 폭압 속에서 살아본 적도, 나라를 빼앗겨본 적도 없었기에 쉽사리 짐작조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선생님의 일기 속 한 구절은 머리를 울리고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아이의 이름 속에서 선생님들께서 갖은 고생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자, 다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양우조 선생님께서는 해외유학이 제한된 일제하에서도 미국에 유학 중 우리 동포들을 입혀보자는 생각을 하시게 되어 방직 공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이후 1929년 상해로 망명하신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과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 활동하시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시어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임시정부 선전위원회 위원과 생계부 차장, 외교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또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훈련과장을 맡으시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최선화 선생님께서는 평양 정의여고보와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이화에서 교사로 재직하시다 중국으로 건너가 양우조 선생님과 결혼하시고 두 딸의 어머니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하며 한국국민당 당원, 한국독립당 당원, 한국혁명여성동맹 결성준비위원 및 회원, 중경 한인애국부인회 재건준비위원과 서무주임(총무)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제시의 일기를 읽으며 선생님들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으리라 짐작도 못했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일기를 통해 제게 그려지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자식에게 한없이 주고 싶은 우리 부모님과 똑같은, 평범한 분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평범한 부모님이셨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셨던 것이지요?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도, 자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 아이가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지금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아이가 다 커서 세상에 나가기 전에 미리 만들어두어야겠다. 그리고 내 아이 앞에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부모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요... 저도 선생님들처럼 그런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선생님들께선 독립운동에 매진하시면서도 자제분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지복영 여사의 회고 중 독립운동가분들의 자제들이 중국에서 나고 자라 한글을 제대로 아는 이가 적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헌데 선생님들께서는 우리가 중국에 온 이유는 중국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들도 우리가 중국에 머무르는 이유를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항상 집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고 사용토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노력은 광복된 조국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본국의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자랄 수 있도록 잘 키워내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여름방학 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독립정신답사단에 참여하여 중경임시정부 연화지 청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 선생님들께서 해방 이후 환국 기념촬영을 하셨던 그 계단에 서서 다 같이 독립군가를 불렀습니다. 7일 동안 계속해서 부르던 노래인데 그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이 마음에 와 닿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으시곤 정신이 아득하고 아무소리도 들리시지 않던,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누워야 할 정도로 착잡했던 심정을 제가 감히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와 당시의 선생님들께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계셨겠지요. 선생님들께서는 그때 어떤 생각과 마음이 드셨을까 하는 생각과 오늘의 제가 있음은 바로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내 주신 선생님들의 덕분이라는 생각에 더욱 감사함과 뭉클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는 오늘 하루도 선생님들께서 만들어주신 독립된 조국, 세계 속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조국에서의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꿈꾸시던 국가의 모습을 지금 얼마만큼이나 이루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절반은 이루었고 절반은 그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히 생각해 보건데 꿈꾸시던 조국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 만 번 흔들리고, 다듬어져야 단단해지고 빛날 수 있을 것 입니다. 선생님의 손주나 증손쯤인 제가 이런 모습의 조국에 살고 있다면, 제 손주가 세상에 나갔을 땐 선생님들께서 꿈꾸시던 조국이 완성되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고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지 은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