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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여운형, 조선은 한일병탄으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439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118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승국 27개 나라가 모여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를 열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김규식 선생을 우리 겨레의 대표로 파견하여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 몽양 여운형 선생이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의 강연을 들은 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심하고 신한청년단을 창당한 뒤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김규식 선생을 보낸 것입니다.


 

이후로도 선생은 오직 조선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던집니다. 그래서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의 뒤에는 여운형 선생이 있다고 하지요. 선생은 191911월 일제의 수도 도쿄에 가서 일본 정부와 언론학계 인사들 앞에서 거침없이 연설을 했습니다. “한일합병을 말하면 그것은 결코 우리 겨레의 뜻이 아니다. 소수 매국자들이 한 짓이며, 또 당시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도 아니었다. 일본은 합병이 양국민의 호의로 되었다고 하지만, 조선 국민은 이에 대하여 원한이 뼈가 사무쳤다. 요컨대 이것은 강제로 된 정치적 불공정이라 곧 합병이 아니라 병탄이다.”

 

이 연설이 있은 뒤 일본 정계에는 태풍이 불었고, 제국의회 해산과 총선거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선생은 광복 뒤인 19477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는데.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던 세력들에게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던 몽양 여운형은 없어져야 할 존재였을 것입니다. 광복 뒤 백범 김구와 함께 몽양 여운형까지 암살당한 것은 우리 겨레에겐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선생의 서훈은 사회주의자란 까닭으로 미루어지다가 2008년에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