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화보] 광화문 6차집회, 성난 민심! 촛불의 바다를 보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한민족은 그 바람 앞을 피해서 바람불지 않는 굴속으로 도망치는 대신 작은 등불을 모아서 밝히고 태풍과도 같았던 역사의 현장에서 분연히 일어섰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서기1200년 당시 이미 그 누구도 대항해볼 엄두를 내지 않았던 세계제국이 된 몽골의 기마병 앞에서 3차례 끈질긴 저항으로 수 십 년 동안 버티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도망쳐버린 임금과 관군을 대신하여 스님들과 뜻있는 선비들 그리고 백성이 들고 일어나 싸움으로 평생을 살아오던 일본의 사무리이 정예군에 감히 맞서서 저항하였다. 그런 끈질기고 기백에 찬 백성들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이순신 장군이 천하명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12척의 전함만으로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승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 조선 말, 세계정세에 눈 어두운 조선의 임금 이하 관료들이 나라의 개혁은 커녕 자신들의 특권과도 같았던 권력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을 때, 그런 나라를 살리고자 나섰던 사람은 다름아닌 한 낱 민초와도 같았던 몰락양반 최제우였다. 그는 본래 우리 민족에게 깊이 간직되어 있었던 고조선 이래 민본사상인 한사상과 동양의 여러 종교 철학에 서양에서 유입된 서학을 접목하여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후천개벽의 철학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종교적으로 정립한 동학을 내세워 백성들을 안심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동학교도들이 요구했던 것들은 지금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들이었지만, 당시로는 혁명 그 이상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동학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관군에 의해 진압할 수 없게되자, 이웃나라 청나라를 끌어들여 진압하려는 권모술수를 택하였고, 청나라 군대들이 들어오자 이를 빌미로 일본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임진왜란으로 패퇴한지 300년 만에 또 다시 일본군을 조선으로 진입시켰다.


이것이 우리가 일제강점기 식민지를 당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남북이 갈라진 채 남한만의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북한에는 김일성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1948년 이후 남한은 민주주의 정부였지만, 집권자들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선거를 조작하고 상대 정치인을 모함과 탄압으로 어떻게든 북한의 김일성과 엮어서 국민을 속였고, 그 때마다 야당 정치인과 국민들은 좌절을 맞보아야 했다.


그리고 어렵게 국민의 선거에 의한 진정한 민주정부가 들어선 것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이에 보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정부를 종북정권이라고 헐뜯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음 정권인 노무현 정부에서는 한민족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화해정책을 꾸준히 전개하였으나, 종북정권으로 낙인찍혀 민족의 통일과 화해를 위한 전진을 하지 못하고, 참여민주정부가 다시 보수정권으로 바뀌었다.


그런 후 남북 사이에는 화해의 정서가 저만큼 물러갔다. 그동안 어렵게 만들었던 남북간의 소통창구도 하나 둘 닫히고, 국민간 교류는 고사하고 정부 당국자간 직통전화도 끊기고,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모든 대화의 창구마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전념하여 스스로 고립의 길에 들어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간 상호 교류를 말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종북론자로 낙인 찍혔고, 그런 이유로 야당의 대표들 조차도 감히 공식적으로 남북간의 화해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한다고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근혜 정부에 들어서 하나 둘 닫힌 남북교류는 민족의 미래에 크나 큰 걸림돌이 되고, 냉전의 철벽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한민족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한국인끼리도 이념갈등을 초래하였다. 한국인은 나라안팎 모두 어느 쪽으로건 줄서기를 강요당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싸우지 않으려면 내 생각과 달라도 그냥 외면하는 것이 최선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정부를 맡은 보수정권은 국민을 보수대 종북으로만 구분하여 보수성향의 표를 결집함에는 성공하였으나, 자신들의 패거리만을 위해 온갖 정책을 짜서 대다수 국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돈이 많은 재벌들에게는 더 많은 부를 축적시키는 정책을 쓰면서도 서민들로부터는 한푼이라도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고 서민을 위한 복지는 말잔치로 끝나기 일 수였다. 뿐만 아니었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의 침몰사건은 세월호에 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2년 6개월이 넘어가도, 그 진상도 밝혀지지 않고, 그냥 묻어버리려고만 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접하면서 어리석기만 한 듯 보이던 서민들은 서러움 속에서도 그 뜻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해 잠자는 듯, 죽은 듯 체념속에 살아오다, 1개월 전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실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면서 들끓어 오르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폭발 마당은 한국의 서울 그 중에서도 심장과 같은 광화문 광장이었고, 백성들은 주말에 야외로 나가서 여가를 즐기는 대신, 정부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을 향하여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뿝은 대통령이 자신의 국가 경영에 대한 견해도 없이, 국민들은 알지도 못하는 최순실이라는 한 여자에 의해서 온갖 정책이 정해지고 집행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것이고, 그 최순실 일가를 위해서 재벌들로부터 출연금을 착출하여 회사를 세우고, 또 최순실의 인맥을 정부의 주요 장관직에 배치하고, 최순실 일가를 위하여 국가의 예산을 쏟아붙는 일을 자행하는 대통령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인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제 12월 3일 초겨울 쌀쌀한 날씨에 몸은 떨리고, 입가에는 하얀 김이 났지만,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태평로를 가득 메우고 시청 서울역까지 그리고 대통령이 집무하는 청와대 주변으로 밀려들어 대통령의 조건없는 퇴진을 외쳤다. 더 이상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을 위해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주장은 그 동안 얼마나 국민들이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에 불만이 있었는지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모여든 인파가, 지구 역사상 가장 많이 모였다고 한다. 어림잡아 170만명이 서울 광화문 근처에 모였고, 지방까지 합한다면 박근혜 탄핵을 외치며 모여든 국민들의 수는 23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시한 폭탄은 던져졌다. 오는 12월 9일 과연 어떤 결과가 내려질 지는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의 투표에 따라서 정해진다. 그 결과가 탄핵찬성으로 될지 아니면 탄핵부결로 날지, 역사에 기록될 하루 하루가 긴박하게 다가오고 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역사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의 판단을 촛불을 켜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켜본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