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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세계문화유산으로 부활한 백제-1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대 한민족 곧 부여족의 하나였던 백제인은 고조선이 분화되면서 생겨났던 북부여국에서 떨어져 나와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초기 백제국을 세웠다. 그 즈음 만주지역에 자리잡은 것은 고구려였다. 백제는 졸본부여사람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세웠다고 하며, 그 시기는 기원전 18년 무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 정착지에 대하여 여러 이론이 있으며, 그 국가로서의 성립은 한강유역이었을 것으로 거의 확정하고 있다. 그 백체 초기유적이 현재 서울 송파구 와 하남시 미사리에 걸쳐 있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춘궁리 유적등이다.


그런 백제는 중국의 요동반도 서쪽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지배했었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 양서, 남사, 진서 등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에 밀려 475년 문주왕때 남쪽으로 밀려나 재기를 꿈꾸었으나,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서력기원 663년 백제는 신라가 끌어들인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공식적으로 그 나라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 때, 동아시아의 해상세력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두루 주름잡던 백제인들은 한반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풍성한 흥왕기를 살았다.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의 남부지방  해안가의 항구를 거점으로 해상무역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그 해상세력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직접 불경을 구해오기도 했다. 그런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은 일본열도에도 진출하여 백제의 장인들과 학자들을 파견하여 백제의 문화를 심어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법륭사(호류지)는 백제인들이 지어준 것으로 일본역사책에 당당히 쓰여있다.


현재 일본의 뿌리문화의 본주류는 그래서 백제문화로 보고 있기도 하며, 일본왕가의 뿌리 또한 혈연적으로 백제왕가의 전승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공식적으로 일본인들은 부정하지만,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는 여러곳에 등장하기도 하며, 수많은 설화도 전하고 있고, 또 현재 일본내 많은 신사의 내력으로도 많이 전하고 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에 훼손될 것으로 보고 이를 부정하고 있을뿐이다.)


이러한 백제문화는 한국의 고대역사에서 사라진 후, 철저히 그 자취들 소멸되고 있었고, 그 중 극히 일부만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오늘에 와서 발굴되어 옛날의 영화를 일부나마 알려주고 있다.


이런 백제가 문화가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준 뒤 공주, 부여, 익산지방으로 남하하여 백제 후기문화를 남겼다. 백제역사유적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시기적으로 이른 시기이면서 더 오랫동안 자리했던 한성유적지역은 빠진채, 공주 부여 익산지역에서 발굴되고 남아있던 유적들만이 등재되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에서 발굴된 유적들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백제전의 유물중 오늘은 건축물에 사용되었던 기와만을 올려본다. 기와는 목조건물의 지붕을 덮었던 재료로 빗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기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기와에 새겨진 다양한 무늬와 글자들로 당시 사람들의 미적감각과 문화적 경향을 알게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기와의 문양은 곧 바로 그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더 없이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백제에서 발굴된 기와의 연꽃문양은 그 미적 감각이 부드럽고 온화하면서 세련된 백제문화에 흐르는 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평가한다.


한편, 지붕을 덮은 기와는 그 종류가 지붕의 위에 흙을 깔고 그 위에 까는 암기와와 암기와 사이를 덮는 수키와를 기본으로 하였으며, 처마끝에는 건축물의 끝부분을 아름답게 마감하기 위하여 암막새와 수막새기와로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였다. 이때 처마 끝에 쓰이는 암막새와 수막새에는 다양한 문양을 그려넣어 더욱 멋진 건축물이 되게 하였으며, 그 문양이 다양하여 기와 수집가들이 즐겨 수집하는 품목이 되었다.


이 때 쓰이던 대부분의 막새기와는 당시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다양하게 변형하여 만든 연화무늬 기와였다. 그런데 발굴된 막새기와는 대부분 수막새기와이고 암막새기와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붕의 맨 위에는 용마루가 있는데, 용마루의 좌우 끝에는 그 마감을 깔끔하게 하기 위하여 보통의 경우에는 암막새를 뒤집어서 쓰는 망와를 쓰기도 하지만, 보다 특별한 경우에는 일반적인 망와를 쓰지 않고, 특별한 장식에 거대한 모양으로 조각하여 기와로 구워서 올렸다.


그런 기와무늬로로 현재 궁궐건축물의 경우 용머리 모양의 용두, 또는 독수리 모양의 취두 등이 있으며, 이런 용도의 기와로 고대건축물에서는 거대한 새의 꼬리를 형상화한 치미를 만들어서 올렸다. 그 치미는 건축물의 규모에 따라서 그 크기도  다양하지만,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치미는 그 거대함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기 충분하다.


미륵사에 사용되었던 치미는 현재 2가지가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큰 것은 높이만으로도 1.5m 이상으로 대단하여 이를 한 번에 만들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나누어 만들어서 이를 다시 가마에 구워서 지붕 위에서 조립하여 완성하였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망와는 그 높이가 30cm 내외임에 비하면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당장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역사유적지역ㅏ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지 1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백제전에 한 번 다녀옴으로써 사라진 백제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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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