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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부모ㆍ형제ㆍ처자보다도 나라가 먼저였던 윤봉길 의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45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을 처단한 윤봉길 의사가 일본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지요.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장도에 오를 때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곧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한 분입니다. 또 그는 어머님께 쓴 편지에서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 세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나라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체포된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그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당해 25살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