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화보] 백담사 만해 한용운기념관에서 확인한 나라사랑










''''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 한목숨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때에도 일제에 아부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친일파,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항변한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어쩔수 없이 친일했던 것이며, 나름대로 조국의 근대화에 상당한 공헌을 했노라고...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선각자로 어렵지만 독립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던 분들이 있다. 그 가운데 불교의 스님으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월 1일 맨손에 태극기만을 들고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선언서의 기초에도 관여했고, 그 부칙으로 '공약삼장'을 더함으로 한민족의 독립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가를 역설했으며, 독립만세운동의 의미와 각오를 민족을 대표로 나선 이들이 스스로 다짐하게 했으며 그 뜻을 전세계에 전했다.


31만세운동을 무사히 마친 뒤 만해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차가운 형무소에 갇혀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그리고 형무소 간수들에게 감화를 주면서 만기를 마쳤다. 다른 사람들은 형무소내 음식이 부실하여 외부로부터 사식을 제공받는 일이 비일 비재하였음에도 스스로 그런 일 하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이를 끝까지 실천하였다. 또 형량 감소를 위하여 변호사를 붙여 변론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기 출소 뒤에도  독보적으로 자신의 뜻을 각종 언론에 기고하여 일제에 끝까지 항거하는 정신을 올곧게 지켜나갔다. 그렇게 꼿꼿한 삶을 살면서, 만년에 성북동 산등성이에 조선총독부가 안보이는 곳에 북향으로 집(심우장)을 짓고 살다가 독립되기 1년 전 1944년 심우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해는 스님이었지만 보통스님들의 장례법인 화장을 하지 않고 망우리에 묻혔다. 그리고 1년후 잔혹했던 일제가 물러가고, 한국이 독립된 뒤 18년 만인 1962년 그의 투철했던 독립정신을 길이 후손에 전하고 그 공적을 추앙하고자 대한민국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렇게 철저히 살아오신 분들이 있음에, 어찌 감히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노라는 변명아닌 변명을 할 수 있을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