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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순한글「데국신문」을 창간한 독립운동가 '이종일선생'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이종일(李鍾一, 1858. 11. 6~1925. 8. 31)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5세가 되던 해인 1874년에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부모슬하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2년 8월에는 박영효 수신사의 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유신 이후 쇄국에서 깨어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일본의 개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후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896년 11월 선생은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민족의식의 진작과 민족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898년 3월 동료들의 추대를 받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1898년 선생은 중추원 의관에 피임되었으나, 당시 나라의 정세는 세계 열강들의 침략과 국내적 혼란 등으로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를 통한이 여긴 선생은 우선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10개월 만에 의관직을 그만두었다.


선생은 신교육의 하나로 1898년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5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2세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30세 전후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을 모아 애국단을 조직하여 유능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특히 신문사업을 실학운동의 재현수단으로 전개해갔다.


이어 1898년에는 순 한글의 [뎨국신문]을 창간하여 여성들도 볼 수 있는 애국계몽지로 간행하였다. 이때 사장은 자본금을 단독 출자한 선생이 선입되었으며, 편집, 제작은 유영석, 이종면, 장효근 등이 담당하고 이승만은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계기, 주자 등의 시설은 심상익이 지원하였다.



같은 시기에 조금 먼저 간행된 [황성신문]이 소수의 한자 해독층을 대상으로 한 특수층의 신문이라 한다면 이 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함으로써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었다. 곧 일반대중과 부녀자 계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계몽에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경영난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과감한 논조로 국권회복과 대중계몽운동으로서의 구실을 함은 물론 당시 신문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였기 때문에 국민계몽에 실질적인 힘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한글사용의 일반화로 민족언어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은 1910년까지 10여 년간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개화와 구국 계몽에 앞장섰다. [제국신문]이 폐간된 후에는 [천도교회월보], [자강회보], [대한협회보] 등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선생의 사상을 펴 나갔으며 필화사건으로 몇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09년 9월 선생은 대한자강회의 평의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이 회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그 후신으로 조직된 대한협회의 회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항하였다. 1912년에는 천도교의 풍족한 재정과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운동, 1904년의 갑진개화신생활운동을 1914년 갑인년에 재현하는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광무황제의 붕어는 수많은 시민들의 울분을 폭발시켰으며 나아가 일인(日人)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식은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을 높이어 국민들의 적대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국민의 마음이 한곳으로 모였을 때 독립운동이 성숙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선생은 시위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일본 동경에서 2월 8일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에 고무된 나라안의 항일운동진영들은 종교 단체들과 유림, 학생 진영과 연합하여 거국적인 구국시위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독립선언일로 2월 28일을 주장하였고, 선언서의 인쇄를 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2월 20일부터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보성사 총무인 장효근과 김홍규, 신영구 등과 함께 좁은 인쇄소 안에서 문을 굳게 닫고 한 장 한 장 평판인쇄기에 찍기 시작했다. 25일까지 1차로 2만 5천장, 2차로 추가 1만장 인쇄를 끝내고 인쇄된 것을 천도교 본부로 운반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각계의 동지 7, 8명에게 2천장 또는 3천장씩 돌려졌다. 이날 선생의 손녀인 이장옥도 독립선언서 배포에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현재 할머니가 된 이장옥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할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선언서를 배포해 주었는데 증표를 제시해야 선언서를 내주었다고 한다. 1차로 인쇄된 2만 5천장은 모두 배포를 끝냈지만 추가로 인쇄한 1만장에 대하여는 전국 각지 주요 도시에 배포할 계획으로 인종식, 곽명리, 안상덕, 강기덕, 오화영, 함태영, 김홍규?장효근 등에게 책임지도록 맡겼다.


한편 27일 갑자기 집회장소가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넓은 장소에 많은 사람이 운집되어 있는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 시민들의 심중이 격양되어 시위가 격렬해지고 따라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을 우려해서 사전에 장소변경을 결정 한 것이다. 2월 28일 저녁 31독립만세 전날 선생은 재동(齋洞)에 있는 의암댁에 갔다. 이곳에서 민족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결의를 새롭게 다지고 선언식의 장소, 절차 등을 마지막으로 협의한 후 33인의 명의로 된 선언서에 각자가 서명 날인하였다.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들은 축배를 드는 한편 총독부에 대하여 지금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있다는 뜻을 전화로 통고 하였다. 이때 의암은 선생에게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고 했다. 선생은 위엄 있고 낭랑한 목소리로 한 숨에 낭독해 내려갔고 자리에 모인 대표들은 숨을 죽이고 이 역사적인 선언문 낭독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는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인편으로 전달하였다. 긴장과 초조가 엇갈리고 있는 중에 20분쯤 지났을 때 일경 15명이 자동차 5대를 가지고 와서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한용운이 벌떡 일어나 "오늘 우리의 모임은 곧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장서고 민중이 뒤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 당당히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독립쟁취를 위해 싸웁시다"고 외쳤다.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다음 일동은 의암을 선두로 일경에 연행되어 갔다. 선생을 비롯하여 이승훈, 나용환 등은 2, 3백 장씩의 독립선언서를 던지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분노, 감격, 흥분, 속에 묻혀있던 군중들도 목이 터져라 하고 만세를 따라 외쳤던 것이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31독립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1922. 3. 1)을 기해 보성사 직원 50여명과 함께 거기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하고 그때 낭독할 제2독립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자주독립선언문을 2월 20일에 작성하여 김홍규에게 인쇄토록 하였으나 일경에 사전에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쇄물도 압수당하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애국충정의 행동과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70평생을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모든 것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다 1925년 8월 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草家) 거적 위에서 68살을 일기로 영양실조 끝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