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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최구현 의병장 묘지석 발굴로 세상에 알려지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4] – 최사묵 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몸이 불편해도 촛불집회에는 꼬박 참석했지요." 1210일 토요일, 7차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던 날, 1시 서울역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최사묵 선생은 84살의 노구에도 기자와 대담을 마치고 촛불현장으로 가기 좋게 약속장소를 서울역으로 잡았다.

 

100년만의 무더위를 기록했던 지난 여름, 욕실에서 나오다 삐끗하여 척추를 다친 이래 여러 달째 척추보호대를 차고 있으면서도 촛불집회에 꼬박 참가해왔다는 선생의 눈빛을 보며 구한말 충남 당진의 당당했던 최구현 의병장(1866 ~ 1906.12.23) 후손임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했다.


 

의병장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제 나이 70이 다되도록 그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한말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부참서관(軍部參書官)을 하던 할아버지께서 을사늑약 이후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한 것 까지는 알지만 이후 종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무과에 급제한 교지(敎旨)까지 있지만 집안 어른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린 손자 최사묵은 더욱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할아버지 최구현에 대한 평생의 숙제를 풀어준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하나의 묘지석(墓誌石)이 사건의 열쇠를 풀어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한민국 역사상 묘지석을 토대로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경우는 최구현 의병장이 처음으로 손자인 최사묵 선생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구현 의병장은 충남 당진 소난지도 의병항쟁의 맨앞에서 의병을 진두지휘하다 40살의 나이로 순국한 분으로 묘지석의 출현으로 사후 98년 만에 뒤늦게 그의 의병활동이 알려져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되었다


최사묵 선생의 할아버지 최구현 의병장의 활동 일부를 국가보훈처 기록으로 살펴보면,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軍部) 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계기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각처에 포고하자, 면천ㆍ당진ㆍ고덕ㆍ천의ㆍ여미 등지로부터 370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 의진의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이 된 그는 휘하 의병을 이끌고 417일 면천성(沔川城)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그 직후 1906423일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唐津)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갔는데 이미 집결해있던 화성의병, 서산의병, 홍주의병 등 120여명과 함께 활동하다 190675일 새벽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체포되고 면천감옥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에는 논 30()을 수탈당한 뒤 풀려나자마자 고문 후유증으로 190612월 "순국의 길을 걷게 된다.

 

최구현 의병장이 순국하고 4년 뒤인 1910년 병술국치를 당하고 보니 최구현 의병장의 삶은 그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최구현 의병장의 무덤 속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내용이 고스란히 새겨진 묘지석(墓誌石) 으로 기록되어 묻혀있었다. 그것이 무덤 이장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문제는 나이 40에 순국의 길을 걸은 의병장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아직 어렸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일제치하에서 의병장 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에 주변에서는 의병장에 대한 일을 쉬쉬하며 지내야했다. 그렇게 의병장 할아버지는 손자인 최사묵 선생이 70살이 되도록 입에 거론 되어서는 안될 인물로 남아있었다. 의병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혹시 모를 일제의 탄압을 고려하여 집안 어른들이 입단속을 하며 지내온 것이었다.

 

아버지 13살 때 의병장 할아버지가 순국의 길을 걸었는데 저 역시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집안 형편은 정말 말이 아니었지요팔순의 손자는 기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바로 어제 일처럼 들려주었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가장 힘든 것은 학교에 월사금(오늘날의 학비)을 내지 못하여 심지어는 시험 보는 날 집으로 귀가 조치 당한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끝을 흐렸다.

 

근근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험을 쳐서 당당히 합격했는데 문제는 등록금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 집에서 키우던 돼지를 고등학교 축산과 선생을 찾아가 실습용으로 사달라고 졸라 돼지를 판돈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지요이후의 삶을 더 물어서 무엇에 쓸까 싶을 만큼 의병장 손자의 삶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진로 걱정을 하다가 장교시험을 본 것은 6.25때 논산훈련소에 강제로 끌려가 졸병생활을 한게 계기가 되었지요. 날마다 두드려 맞고 기합을 받으면서 장교 시험 공고를 보고 도전했는데 합격했어요. 졸병 때와는 100%다른 삶이 펼쳐졌지요. 그러나 졸병 때 한 결심이 있어 사병들을 친 동생처럼 대하는 등 군대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역하여 고등학교 교련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혹독한 군사훈련보다는 정신교육에 치중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친 자유로운 교련으로 비쳐졌는지 학부모들로 부터는 큰 호응을 얻었지만 교장으로부터는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고 귀띔한다.

 

을사늑약을 당하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조선 민족이 일제의 노예가 될 수 없다며 의병을 모아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사람들. 충남 당진의병을 진두지휘했던 최구현 할아버지도 그 당당한 의병장 가운데 한분이었다. 구한말 과거급제 사실이 적힌 진한 먹글씨에 붉은 인장이 찍힌 교지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옴에도 할아버지의 행적을 알 수 없었던 후손들에게 의병장 할아버지의 출현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으리란 생각이다. 어디 이것이 한 가정의 기쁨과 감격에 그칠 것인가!

 

뒤늦게나마 할아버지 사후 98년 만에 묘지석을 통해 최구현 의병장의 늠름한 기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다행이지만 할아버지의 순국으로 당해야했던 후손들의 고통은 누가 헤아려줄 것인가? 의병장으로 뒤늦게 공적을 인정받아 2004년에야 보훈연금 대상자가 된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장손인 형(최충묵)2009년 운명을 하는 바람(연금은 손자까지 받을 수 있지만 법이 개정되어 장손이 아닌 최사묵 선생은 해당이 안됨)에 그마저도 끊긴 상태다.


 


의병장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몸이 아프다고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광화문에 촛불 인파가 많이 몰리기 전에 광장에 나가서 동료들을 만나고 주변을 살피다가 인파가 몰려들면 먼저 나옵니다. 지난주에는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하는 바람에 몸이 안좋은 상태에서 인파에 밀려 혼났습니다. 오늘도 어서 나가봐야합니다.” 대담 시작 2시간이 되어 시계가 3시를 가리키자 최사묵 선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리를 일어서기전 건넨 명함에는 최구현항일의병장유족회장(손자)”라는 직함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소중히 간직해온 자랑스런 최구현 의병장 할아버지에 관한 학술논문집, 교지, 훈장, 각종 신문기사 등에 관한 자료를 기자에게 건네주고 황급히 촛불집회 현장으로 떠나는 팔순의 손자를 보며 기자는 역사 속에 묻혔던 최구현 의병장의 높은 기개를 다시 보는 듯 가슴이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