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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사당패와는 다른 남사당패 우두머리, 꼭두쇠

[국악속풀이 29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지운하 명인과 관련하여 <남사당(男寺黨)>패 이야기를 하였다. 다양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전국을 돌며 민중들과 함께 애환을 함께 해 온 집단으로 풍물놀이, 버나돌리기, 살판, 줄타기, 탈놀음, 꼭두각시놀음 등이 주 연희종목이었다는 점, 지운하는 인천태생으로 어려서부터 동네 어른들이 치는 풍물굿을 들으며 자랐고, 숭의초등학교 시절부터 박산옥(朴山玉)이나 최성구 명인을 초청하여 지도를 받았으며, 졸업 후에는 김문학이나 남사당패의 유명한 스승들에게 풍물을 단계별로 익히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가 살던 도화동 마을의 <풍물단>이 경기도 대표팀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할 때, 지운하 소년이 12발 상모를 너무도 잘 돌려 인천 풍물굿의 대스타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하였으며, <도화동 풍물단>이 인천 대성목재 소속으로 된 직후에는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출중했던 단체였다는 점도 이야기도 하였다.

 

지운하는 연주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우리의 풍물굿 가락을 지도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 어려서부터 남사당에서 생활해 온 예인이어서 남 다른 그만의 생활철학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선생을 존경하고 후배들을 보살피는 인간적 유대가 돈독한 사람이란 점도 이야기 하였다.



이제 남은 인생을 고향땅 인천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며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그가 속해 있던 조직, 남사당의 구성이나 기능, 역할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해 보고자 한다. 먼저 남사당과 사당패란 명칭은 같은 의미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심우성이 쓴 남사당패연구를 참고해서 그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명칭이 유사해서 분별이 어렵긴 하지만, 사당패의 조직은 그 주된 구성원이 여자이기 때문에 일명 <여사당>으로도 통했다. 또한 이 패거리는 가무희를 앞세우고 매음을 하는 패거리로, 맨 위에 모갑(某甲)이란 서방격의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居士)라는 사나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 볼 때에 모갑이인 남자가 이끄는 패거리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걸립패의 화주(시주를 받아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 출신이 많았다고 하며 사당에 붙어먹는 기생자들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겉으로는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점을 내세우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그 걸립패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절에서 내어 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았고, 그 수입의 일부를 절에 바친다는 것이다. 이미 1930년대 이후, 그러한 패거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여하튼 사당패란 조직은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가무희를 펼치고 그 수입으로 살아가던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사당패의 모갑이 이하 거사들 대부분이 걸립패의 화주 출신이 많았다고 했는데, 걸립패란 또한 어떤 형태의 패거리였을까?


 

역시 심우성의 글을 참고해 보면 걸립패란 조직에서 그 우두머리를 화주(化主)라고 했고, 화주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승려나 승려출신의 고사꾼인 비나리가 있고, 또한 보살이나, 풍물잽이, 연희자들인 산이, 탁발 등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수는 보통 보살이 1~2, 풍물잽이가 10여명, 버나나 또는 다른 연희자들이 2~3, 그리고 얻은 곡식을 운반하는 탁발 등이 있어서, 모두 15~6명 안팎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이들 걸립패는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는 절의 신용장 같은 신표(信標)를 제시하고 마을이나 개인을 상대로 터굿 등을 청하게 되며 허락을 받게 되면 본격적으로 집걷이를 하게 된다. 놀이는 으레 풍물놀이로 시작되는 것이다.

 

한바탕 풍물을 치고 난 후, 몇 가지 기예를 보여준 다음에는 터굿이나 샘굿, 조왕굿에 이어 성주굿을 하게 되는데, 이때 곡식과 금사품을 상위에 받아 놓고 고사문서를 외는 비나리를 하게 된다. 이 비나리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받아놓은 곡식이나 금품을 그들의 수입으로 한다는 것이다. 걸립패가 한창 성했을 당시에는 이밖에 탈놀이도 있었다고 한다. 사당패와 걸립패에 관하여 간단히 그 조직이나 연행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남사당패의 조직은 어떠한가?

남사당패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부르며, 그 밑으로 보통 4~5명의 연희자를 두고 있는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는 40, 50명 이상을 거느린 조직도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원래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남자들만의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앞의 사당패나 걸립패와는 그 구성이 다르다는 점을 알게 한다.

 

남사당의 큰 집단은 꼭두쇠 밑에 곰뱅이쇠라고 부르는 조직의 기획일을 전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어느 조직이고 간에 꼭두쇠의 역량은 절대적이어서 그 능력에 따라 식구, 즉 구성원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밑의 곰뱅이쇠의 주 임무는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었다고 하니 곰뱅이쇠의 외교능력에 따라 그 마을에서 놀이마당을 여느냐, 못 여느냐 하는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꼭두쇠와 곰뱅이쇠 밑으로 뜬쇠라 부르는 남사당놀이의 기능자 중에서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들이 있는데, 그 수는 일정치 않으나 대략 13~14인 안팎이었고, 뜬쇠 밑으로 가열이라 부르는 기능자들이 있고, 그 아래 초보자나 신입의 삐리가 있었다. 이들은 풍물에 이어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연희종목을 펼쳐 보이는데, 거의 일정한 보수가 없이 숙식만 제공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을 새워가며 일반 대중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놀이를 해 온 패거리라는 점에서 앞의 사당패나 걸립패와는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