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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백제 미륵신앙의 성지 김제 금산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대 한민족은 고조선에서 내려온 부여족이 따스한 남쪽나라로 내려와 고대국가를 여럿 창건하였다. 고조선이 여러 분국으로 분화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가 터를 잡았고, 또 다른 부여족은 중국동부지역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서남쪽지역에 터를 잡고 백제를 건국하였다. 이때 백제인들은 산동반도와 한반도를 오가는 뱃길을 주름잡고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여 동아시아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여 뱃길을 장악하였다.


백제인들은 한반도 서남쪽에만 좁은 지역의 부족국가와 같은 작은 고대국가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주름잡던 세력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양대국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 동해안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선과 항로를 장악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 또한 이들의 후예였다.


이런 백제는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전에 이미 항해술을 바탕으로 인도에까지 가서 불경을 직접 구해오기도 하였다. 이때 중국과 한국이 불교를 중심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지만, 불경이 들어오던 길은 대부분 북방의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하거나, 그 북쪽 유목민족들이 장악했던 초원길을 돌고 돌아 목숨을 걸고 엄청난 고생으로 인도를 오고 갔었으나, 백제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험한 바닷길을 통하여 인도까지 갔었으니, 이들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렇게  불교는 백제 땅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특히 다른지역과는 달리 미륵신앙으로 활짝 폈다. 미륵신앙이란 불교신앙의 한 종류임에는 분명하지만, 특별한 신앙이다. 석가모니불은 이땅에 불교를 처음세운 교조임에 틀림없으나, 그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의 가르침은 위대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륵은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이세상에 온다는 부처로, 세상에 불교를 세웠던 석가모니가 직접 설법으로 예언한 부처이다. 그러니 이미 세상에서 없어진 석가보니불 보다는 앞으로 언젠가 온다는 부처인 미륵불이 오는 곳이야 말로 미래의 불국토일 것이라는 것이 미륵불신앙이 융성하는 근거가 된다.  이런 역사적 문화적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 미륵보살과 미륵불이 조성된 근거이다.


 한국 고대조각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은 국보 78호와 국보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고, 일본에는 목조로 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작품들은 바로 백제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세상에 미륵불로 출현할 보살이 현재 도솔천에서 천상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 미륵보살이 언젠가 이땅에 다시 온다면 그 때는 보살에서 부처로 온다는 것이 미륵신앙의 본질이고, 그 미륵불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백제여야 한다는 것이 미륵불국토를 꿈구어온 백제의 불교신앙이었던 것이다.


이런 불교신앙으로 백제지역에는 많은 미륵사찰들이 들어섰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익산 미륵사, 김제 금산사, 보은 법주사, 태안 개태사, 논산 관촉사 등 많은 미륵신앙의 사찰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아 서기 599년 백제 법왕 원년에 창건된 김제 금산사는 한때 후백제의 견훤이 그의 아들에 의하여 위폐되기도 하였던 역사적인 사찰이기도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혜공왕시절 진표율사가 점찰법회를 개최하여 스님들이 수계를 받는 방등계단을 세웠던 절이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주석하면서 대대적 중창불사를 이루어 대가람으로 그 위세가 떨쳤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억불정책으로 차츰 쇠하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호남지역 승병들의 집결지로 수천 승병들이 금산사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런 스님들이 있었기에 호남지역은 정유재란 이전에는 온전히 전화를 입지 않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재침한 왜병들이 사찰을 불태워 전소하고 말았다.


금산사는 이렇게 전소된 이후  1601년 수문대사가 주석하여 전각들을 하나 둘 다시 중건하였고, 1635년 경에는 미륵전과 대적광전을 완성하여 다시금 미륵신앙의 전통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피폐한 국가적 전란이후 사찰을 이전의 모습으로  중건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이 들어,  전란 이전에 있던 전각들에 비하여 미륵전이나 대적광전도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말았다.


현재 있는 미륵전이 한국내 유일의 3층전각이라 하나, 그 이전의 전각에 비하여 축소되고 말았으니, 한국의 문화는 시대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융성했고, 내려올수록 왜소하게 축소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축소된 현재의 모습이지만 금산사 미륵전은 미륵신앙의 본찰로 통3층 전각에 거대한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모악산의 남쪽기슬에 광대한 면적으로 차지한 금산사는 산속에 묻혀있으나 평지에 세운 절처럼 넓기만 하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수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지금도 많이 있어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자 하는 많은 탐방객들과 미륵불을 찾아 소원을 빌고자 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인의 안식처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현재 금산사의 국보와 보물

미륵전(국보 62호) 

대적광전은 국보(63호)였으나 1985년 전소되어 해제됨

보물 제22호인 금산사 노주,

보물 제23호인 금산사 석련대,

보물 제24호인 금산사 혜덕왕사탑비(慧德王師塔碑),

보물 제25호인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6호인 금산사 금강계단,

보물 제27호인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보물 제28호인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828호인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7호인 금산사 대장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