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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즈믄 해를 넘어 일본서 만난 고구려 혜관스님

일본 미즈사와데라(수택사), 혜관스님상 첫 공개

[우리문화신문=일본 군마 다카사키 이윤옥 기자]


" 아! 이곳에 고구려 혜관스님 동상이? 스님 사진을 찍어도 됩니까? "

" 물론이죠. 얼마든지 찍으십시오"




주지스님은 친절히 대답했다. 본당(한국의 대웅전)안은 약간 컴컴했으나 고구려 혜관스님 동상 앞에 켜놓은 두 자루의 촛불이 이내 주위를 밝혀주었다. 자세히 보니 혜관스님의 동상은 목상(木像)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1,300여 년 전 멸망한 고구려의 스님을 수택사(水澤寺, 미즈사와데라) 본당에서 마주하다니 기자는 잠시 감격에 겨워 울컥 목이 메었다.


"고구려 혜관스님을 찾아 우리 절에 온 한국인은 이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우리 절에 관한 자료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이 자료가 전부입니다만 혹시 이 선생님께서 다른 자료를 찾게 되면 알려주십시오."


주지스님은 젊은 분으로 몹시 친절했다. 기자가 찾은 12월 31일 오전 10시는 일본절에서는 한국의 석가탄신일에 버금가는 중요한 날로 새해를 절에서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기에 주지스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주지스님은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온 기자를 위해 따끈한 차 한 잔을 내어주며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종무소 한편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명함을 건네자 스님도 야마모토 도쿠메이(山本德明)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미리 마련한 6쪽에 이르는 수택사 관련 자료를 기자 앞에 내놓는다.


"수택사(水澤寺)는 1,300여 년 전인 서기 625년 아스카시대 스이코왕(推古天皇)의 칙령으로 고구려에서 건너온 고승 혜관(慧灌, 에칸)스님이 개산(開山, 산문을 연다는 뜻으로 창건을 뜻함)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혜관스님은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이며 수택사 외에도 나라(奈良)의 반야사(般若寺, 한냐지)등도 건립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주지스님이 건네준 자료 첫장 첫줄에 나오는 말이다. 수택사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군마현의 이카호(伊香保) 온천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어 불교신도가 아니라도 유서 깊은 절인 만큼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특히 수택사는 관음성지의 명소로 판동33개소(坂東三十三箇所)곧 관동일대의 33개 명찰 가운데 제16번째 절로 기자와 대담을 하는 사이에도 순례자들이 가져온 납경장(納経帳, 순례한 절에서 확인 받는 수첩)에 주지스님이 붓글씨로 일일이 사인을 해주느라 분주했다.





"아시겠지만 일본의 스님들은 결혼을 합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제가 3대째이지요. 사실 수택사가 오늘날처럼 신도들이 몰려들고 사세(寺勢)가 확장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되돌아보면 꿈만 같습니다. 제가 올해 44살입니다만 아버지대(代)에서는 절의 경영이 너무 어려워 제가 어린시절에는 어머니를 도와 표고버섯을 채취하여 팔 정도였지요"


수택사는 창건당시에는 당우(堂宇)만도 30여 채가 있었고 불상도 1200개에 이를 만큼 큰 규모의 절이었다. 그러나 세 번의 화재를 만나 지금의 본당은 에도시대(江戸時代)인 1688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에도시대만 해도 도쿠가와 막부의 든든한 재정적 후원이 있었으나 이후 명치정부의 폐불훼석(廢佛毁釋, 불교를 타도하고 신도(神道)를 받드는 것) 사건으로 수택사도 그만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승려들은 절에서 쫓겨나고 불상이 파괴되는 등 한마디로 불교의 분서갱유 광풍이 분 것이다. 1871년 (명치4년) 1월 5일 명치정부는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를 통해 절의 재산을 몰수해버렸다. 상황이 이러고 보니 고찰들이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수많은 자료와 문헌들을 챙길 여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없어진 불상이며 경전 등의 손실은 또 얼마이던가!


수택사 본당의 혜관스님 목상(木像)에 관한 자료 역시 주지스님은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다만 본당 건물이 낙성된 1688년 이래 줄곧 본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니 그 무렵 또는 그 이전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본당에 부처와 나란히 승려상(僧侶像)을 안치한 절은 주지스님 역시 다른 절에서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주지스님은 혜관스님 목상이 할아버지 이전부터 본당에 모셔져 있던 것이라 제작연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혹시 기회가 되면 제작연대를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사실 나라시대 고승인 의연(義淵, 기엔, 643~728)의 승려상(僧侶像)처럼 일본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승려상(僧侶像)들은 그 연원이 1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그렇지만 불교에서 불상 외의 상(像)을 만든다는 것은 어지간한 고승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고승상을 부처와 법당에 나란히 모신다고 하는 것도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수택사 본당에는 고구려 혜관스님의 목상(木像)이 모셔져있다. 고구려 혜관스님의 유적을 찾아 온 사람이 기자가 처음이라고 하니 이 목상의 공개도 이번이 처음 일 것이다.





수택사를 찾아 가기 앞서 기자는 사실 수택사에 누리편지(이메일) 한통을 보냈다. 수택사를 방문할 예정이니 고구려 혜관스님에 대한 자료를 좀 얻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문헌자료(6쪽 짜리)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면서 혹시 기자가 갖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자가 갖고 있는 혜관스님에 관한 자료를 보냈다. 다음이 그것이다.


『日本書紀』『元亨釋書』『本朝高僧傳』『續日本紀』,『日本三代實錄』,『日本紀略』,『類聚國史』,『三論師資傳』,『僧鋼補任(興福寺本)』,『僧鋼補任抄出』,『扶桑略記』,『日本高僧傳要文抄』,『東大寺具書』,『內典塵露章』,『三論祖師全集』,『東大寺續要錄』,『三會定日記』,『東大寺圓照行狀』,『東國高僧傳』,『淨土法門源流章』,『寧樂逸文』,『平安逸文』,『鎌倉逸文』,『大日本古典文書』,『大日本史料』,『淨土依憑經律論章疏目錄』,『三論宗章疏』,『東域傳燈目錄』,『諸宗章疏錄』, 『大正新修大藏經』,『日本大藏經』,『群書類從』,『續群書類從』,『續續群書類從』


특히 위 자료 가운데 1702년에 나온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는 고구려 혜관스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지면 관계상 생략하지만 기자는 고구려 혜관스님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들이 국내에는 거의 없어 연구가 쉽지 않아 진척이 더디다. 하긴 해당 절에서도 이렇게 혜관스님의 자료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수택사에는 고구려 혜관스님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오는데 《판동33관음순례(坂東三十三所觀音巡禮), 朱鷺書房, p.78~81》에는 다음과 같은 이카호낭자(伊香保姫)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계모에게 구박받은 한국판 숙영낭자전을 연상케 한다.

 

이카호낭자는 5세기의 리츄천황(履仲天皇) 때 관리였던 아버지가 죄의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간 곳에서 1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계모를 들였다. 마침 아들은 집을 떠나 관리가 되어 화를 면했지만 세자 매 중 두 명은 이미 살해당했고 이제 이카호낭자도 계모 손에 죽을 찰나에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치더니 계모를 쓰러뜨리고 이카호낭자가 구출된다.


그때 하늘에서 이카호낭자 손에 쥐어준 불상 덕으로 낭자는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낭자는 이 불상을 고구려 혜관스님께 말씀드려 수택사를 짓고 본존불로 모셨다고 한다. 실제 수택사의 본존불인 십일면관세음보살은 예부터 융통관세음(融通観世音)으로 알려졌는데 중생의 일체의 소원을 들어 손을 내밀어주는 보살로 유명하다. 이것이 지금의 수택사 본당에 모셔진 본존불로 이 불상은 비불(秘佛)로 공개하지 않는다.


고대 한국에서 일본땅에 건너가 불법(佛法)을 편 고승들은 고구려 혜관스님뿐만이 아니다. 성실종의 시조인 백제 도장스님, 초대승정을 지낸 백제 관륵스님, 첫 화엄경 강설자인 신라의 심상스님 등 숱한 고승들이 일본 불교계에서 활약했음을 일본의 사서(史書)들은 앞 다투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에 대한 일본 내의 연구는 많지 않다. 또한 한국의 사정도 같다.


"사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절에서 호적 일을 다 맡아 보았어요. 글을 아는 사람들이 마을에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할아버지가 수택사의 유래에 대한 것도 꼼꼼하게 남긴 것입니다."


야마모토(山本) 집안(家)에서 3대째 주지를 맡고 있는 주지스님의 할아버지 때란 불과 지금로부터 100년 전 일이다. 이 시절에도 글줄깨나 아는 사람은 승려들이었다. 하물며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 때(552년)의 승려들이란 불교뿐만이 아니라 수준 높은 문화 창달자의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필 연중 가장 바쁜 날 수택사를 찾은 기자에게 야마모토 도쿠메이 주지 스님은 바쁜 내색 없이 친절히 고구려 혜관스님의 발자취를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대담을 마치고 본당을 비롯하여 경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까지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른 일정으로 자정에 있을 제야의 타종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기자를 위해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면서 여행길에 먹으면 맛있을 것이라면서 까만 알사탕을 쥐어 주었다.


알사탕 한 알을 입에 물고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절 수택사 경내를 천천히 거닐어본다.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맑았고 겨울 날씨 답지 않게 포근한 가운데 병신년 한해를 마무리하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경내를 조금 벗어나 오덕산(五德山)으로 오르는 호젓한 산길로 들어섰다. 고구려 혜관스님도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멀고먼 고구려 땅에서 이곳 일본 군마현 미즈사와 땅까지 이름을 떨친 혜관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온 한국인이 1,300여 년 동안 한사람도 없었다니...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산문을 나와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미즈사와우동으로 유명한 곳이기에 우동 한 그릇을 시켜놓고 식당 밖 통유리 넘어 수택사로 눈길을 돌려본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덜어주는 관음성지의 고찰, 수택사의 영원한 발전을 마음으로 빌면서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우동발 처럼 지난한 세월을 이겨낸 혜관스님의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기자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혜관스님의 또 다른 유적지인 광은사(光恩寺,고온지)로 떠날 참이다.


고구려 혜관스님의 유서깊은 절 수택사(水澤寺, 미즈사와데라) 가는 길

  * 주소: 群馬県渋川市伊香保町水沢214

  * 전화: 0279-72-3619

  * 가는 길: 나리타공항에서 바로 가는 경우에는 제2터미널 10번 버스승차장에서 다카사키역(高崎駅)까지 직행 (2시간 40분 걸리고, 요금은 4,650엔), 다시 다카사키역 2번 버스 승차장에서 이카호온천(伊香保温泉)행을 타고 미즈사와데라(水沢寺, 수택사)에서 하차(1시간 걸리고 요금은 1,000엔). 다만, 다카사키역에서 미즈사와데라까지 가는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정도로 드물고 일찍 끊긴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10분 거리에 있는 유명한 온천지인 이카호온천에서 1박을 하고 수택사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