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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북로군정서 참모장을 지낸 이장녕 선생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대한제국 육군부위로 복무하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중국 유하현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자건설 및 독립군양성에 힘썼으며, 1911년 군정부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이후 북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신민부 등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핵심 간부로서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투쟁에 일신을 돌보지 않았던 선생은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토비에게 피살 순국하시니 향년 51세였다. 


이장녕 선생은 1881년 5월 20일 충남 천안군 목단면 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하여 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하였다.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황실 친위대에 입대하라는 특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가재(家財)를 정리하여 가족과 함께 1907년 11월 20일 중국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국외망명자가 되었다.


그 뒤 뒤따라 온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이회영(李會榮) 형제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힘스고 신흥강습소를 창설하여 선생은 교관으로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서일(徐一) 선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정부(軍政府)(일명 大韓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 지위를 갖추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북로군정서는 무장투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으로 편성하고 편제는 1개 군대가 50명,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2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북로군정서는 북간도지방의 군사 주력부대로서 군인을 모집 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여 임전태세를 확립시키는 한편 곳곳에 경찰사무와 정보연탁기관을 설치하였으며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설치하여 기간요원의 단기속성 양성에 주력하고 있을 때 선생은 교관으로서 활동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있을 무렵 북로군정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군으로부터 최신무기를 구입하여 1920년 8월 현재 병력규모는 1,600여 명, 소총 300여 정, 권총 150여 정, 기관총 7문으로 무장하여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계획하고 중국에 은근한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 일 양국은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영토내에 독립군 대부대가 무장하고 일본에 향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당국에서 독립군을 보호하는 결과이므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내정간섭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싸울 능력이 없었던 중국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독립군에게는 산중(山中)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좀 더 실력이 증강될 때까지는 일본군과의 전면전(全面戰)은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20년 9월 20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이동준비를 서두르던 중 「훈춘사건(琿春事件)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조종을 받은 마적떼 4백여 명이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고 일경간부 가족 부녀자 9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 자작극을 구실삼아 중국 당국의 양해도 받지 않고 연대병력을 전격적으로 출동시켜 한국인 부팍을 모조리 습격해서 방화, 살인, 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북로군정서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협공작전을 폈으나 북로군정서군이 이를 사전에 간파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합류하고 백두산지역에 새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군의 집요한 작전으로 일전(一戰)을 불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25㎞에 달하는 긴 터널과 같은 계곡으로 좌우에는 울창한 삼림지대로 겨우 인마(人馬)통행만이 가능할 정도로 협소하였다.



청산리대첩후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의 참모총장이 되다


북로군정서군은 1제대장 김좌진 장군과 2제대장 이범석 장군의 지휘로 요충지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1920년 10월 20일 상오 9시 안천(安川)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지형정찰도 하지 않고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 부대의 매복지점에 들어서자 독립군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격멸시켰다. 일본군 본대까지 달려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 포진하고 있는 독립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한독립군단은 이후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고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노령(露領)으로 이동,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있던 공산계열인 소련군과 동상이몽 식이었으나 한동안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속뜻이 다른 소련군과 갈등관게를 유지하던 독립군은 소련과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협상을 벌이던 일본이 소련영토에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상 적절치 못하다는 끈질긴 항의와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싸움 때문에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통고받는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자, 1921년 6월 28일 소련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장갑차, 기관총으로 독립군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독립군은 이 싸움에서 3백여 명이 전사하고 2백 50여 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불리는 이 참변후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했다.


대한독립군단 재편으로 1924년 3월 대한독립군정서군이 조직되자 선생은 다시 적극 참여했으며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어 독립단체가 통합되려 할때 윤각(尹覺)과 함께 참가, 회의의 주비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신민부를 조직했고 신민부(新民府)의 참의원으로 선임됐다.


1930년 7월에는 홍진 선생이 한국독립단을 조직하자 감찰위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일제의 압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더욱 가혹해졌으며 선생이 있던 중국 동북지역도 에외가 아니었다. 활동의 폭도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같이 싸웠던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하자 독립운동무대를 상해로 옮기기 위해 북경으로 떠날려고 하였으나 1932년 1월 24일 선생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됨으로써 그 거룩한 뜻, 조국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역에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공훈>


1910년신흥강습소 교관(중국 유하현)

,1919년 북로군정서 참모장

, 1924년신민부 참의원

, 1932. 1월순국

, 1963년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