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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안중근 장군님께 바치는 글 -정광일-

[100년 편지 256]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역사의 수레바퀴로 110년 전으로 되돌려봅니다. 안중근 장군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1907년입니다.

한반도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이미 일본이 우리나라와 강제조약을 체결하고 우리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뒤 2년이 지났습니다.

 

고종황제는 2년 전인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 부당하다는 것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헤이그로 밀사를 보냈다는 것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폐위 시킵니다. 그리고 곧바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킵니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 되던 날 울분을 참지 못한 대한제국 장교군인이 자결을 하고 이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이 긴급하게 무장하고 일본군대와 맞서면서 서울에서는 삽시간에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안중근 장군께서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서울에서 우리 군인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진 그 현장을 똑똑하게 목격하고 연해주로 망명을 결행했습니다. 안중근 장군의 연해주 항일전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의병부대 안중근 장군의 대한의군이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의 신무기와 맞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19091월 안중근 장군께서는 작전을 변경하십니다. 12명의 동지들을 규합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 한 후 손가락을 자른 붉은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을 남깁니다. 12인의 단지동맹은 하얼빈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19091026일 아침 하얼빈 역에서 쏘아올린 총성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 야욕을 전 세계에 폭로한 의혈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전투는 잠자는 중국 대륙을 깨우고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었습니다.

 

안중근 장군의 세 번째 전투는 뤼순감옥과 뤼순 법정에서 계속됐습니다.

 

나는 사사로운 개인감정으로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전쟁에서 적장을 처단한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세계를 향해 이등박문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인으로 규정, 이등박문의 죄상 15가지를 열거했습니다.

 

우리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 강제로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해 간 죄,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 시킨 죄, 우리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죄, 무고한 우리 백성을 죽인 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법정에서 이등박문을 죄인으로 공표한 안중근 장군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부당한 재판 과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 장군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갈구했습니다.

 

나의 시신을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조국이 독립이 되면 조국으로 반장해 달라.” 는 유지를 우리는 100 여년이 지나도록 받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가 서로가 주권을 인정하고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간곡한 유지도 지난 100 여 년 동안 제대로 받들지 못했습니다.

 

2017, 당신은 고독한 영웅입니다.

2017, 우리는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남북화해와 협력을 통한 우리조국 하나 되기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 광 일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 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