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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린 민족대표 33인 '권병덕 선생'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권병덕(1868. 4. 25 ~ 1943. 7. 13)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주 사람이며, 천도교인이다.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 무렵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華館)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는 이 때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中央敎會 審計院長)·감사원장(監査院長)·선도사(宣道師) 등을 역임했다.


 저서(著書)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권병덕 선생은 2017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