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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시베리아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님께

[100년 편지. 257] -문영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께서 낯선 땅 우수리스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시다 일제의 무자비한 총탄에 세상을 떠나신지 어느덧 97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내신 일생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선생님은 뜨거운 민족애로 한인들의 난로역할을 하셨습니다. 한인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틀을 마련하시어 학교를 세우시고, 후학들의 장래를 위해 일찍이 장학사업도 하셨지요. 낯선 러시아 땅에서 차별받는 한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신 선생님을, 한인들은 최페치카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은 동양의 카네기라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이루셨습니다. 선생님은 러일전쟁 후,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위기를 직시하시고 많은 재산을 털어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대한의군의 숙식과 무기를 제공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조국독립의 뜻을 둔 애국지사들의 손을 맞잡고 대한의군이 국내진공작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셨습니다.


 

일본의 방해공작 탓에 위기도 여러 번 넘기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인격은 러시아인들도 감동시켜 일본의 모함임이 즉시 밝혀졌습니다. 일제는 드디어 대한의군의 무기를 환수시켰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인들의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언론으로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대양보와 대동공보는 선생님의 항일운동의 증거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선생님이 사장으로 있을 때 대동공보에서 기획했지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후 선생님은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일제의 간섭을 피해 권업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으시며 권업신문을 발간하셨지요.

 

1914, 선생님은 재미 독립투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러시아 한인이주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전세계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하셨지요. 선생님은 준비위원장으로서 많은 돈을 들여 성대한 준비를 했지만, 애석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외치려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죠.

 

1917,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러시아 황군인 백군과 동맹을 맺었지요. 한인들의 적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이었기에 백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이루는 날까지 선생님과 독립투사들은 일본과 싸우는 길만이 애국의 길이었죠.

 

그러나 192044,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켜 러시아 부대와 한인마을을 습격했습니다.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일대의 독립투사들이 붙잡혀 무차별 학살을 당했습니다. 44일 선생님은 우수리스크의 집에 들렀다가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라는 가족들의 권유를 마다하셨죠. 만약 도주하면 가족들이 받을 고통을 생각하시고 살만큼 사셨다고 가족을 보호하셨습니다. 일제는 선생님을 체포하자마자 바로 하루 뒤에 재판절차도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하신 선생님은 우수리스크의 왕바실재 언덕에 흔적도 없이 묻혔습니다. 사회주의 혁명 후 자산가의 후손으로 박해를 받은 선생님의 가족은 암흑의 시간을 견디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존경하는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은 자산가로,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 언론가로, 자상한 가장으로,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러시아에서도 니꼴라이 2세 대관식에 한인대표로 초청을 받으셨고, 얀치혜의 군수를 지내셨고, 수차례에 걸쳐 훈장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함경도 산골 경원에서 노비로 태어나셔서 배가 고파 러시아 땅으로 가신 선생님. 선생님은 낯선 땅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민족의 등불이셨습니다.


 

대한민국은 해방이 되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후, 두 동강으로 나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를 기억하고 공훈을 가린 것도 선생님의 사후 42년이 지난 1962년에서야 선생님께도 건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갈려 이념적 갈등으로 대치하는 동안, 선생님의 애국 애족 정신을 선양하지도 추모하지도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후손으로서 너무나 송구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2012, 연해주 탐방 길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의 이름을 들었고, 선생님의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처럼 훌륭한 분을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안타깝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아동청소년 작가로서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이제라도 선생님을 알려야 한다는 뜨거운 사명감이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가르친 롤모델이시며, 성인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엄청난 부를 이룬 선생님은 그 많은 재산과 영화와 명예를,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또한 동족의 행복을 위해 과감히 내던졌습니다.

 

저는 연해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2014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낸 인연으로 이제나마 선생님의 이름을 걸고 선생님의 조국애와 민족애를 선양하며 고려인 후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는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의 일을 거들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제야 선생님을 알게 된 사실이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상기하며 앞으로 선생님을 선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자강연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선생님의 위대한 삶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본받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머무셨던 우수리스크의 고택도 이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뒤늦게나마 서울 현충원에 선생님의 위패도 모셨습니다. 앞으로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선생님이 쓰러지신 우수리스크의 왕바실재 언덕에 추모비를 세우는 일입니다. 지난 한가위 연해주를 찾았을 때 저희는 선생님이 쓰러지신 추정지에서 선생님의 영정을 놓고 성묘를 올렸습니다. 이제까지 추모비조차 세우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2020년이면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00주기가 됩니다. 그때는 꼭 선생님의 순국장소에 비석이라도 세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의 삶은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가슴을 뒤흔드는 감동의 불꽃입니다. 그 불꽃은 길이길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활활 타오르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울 것입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이 마지막 숨을 거둔 왕바실재 언덕에 추모비를 세우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죄송스러운 편지를 줄입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바칩니다. 부디 평안하소서

    

문 영 숙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 상근이사

안중근, 최재형 홍보대사

역사의 변방에서 잊혀져가는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코리안디아스포라 작가 , 역사동화와 청소년소설 작가.  

 

작품 :<무덤속의 그림>,<궁녀 학이>,<아기가 된 할아버지>,<치매 마음안의 외딴방 하나><에네껜 아이들> <검은 바다><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꽃제비, 영대>, <벽란도의 비밀청자>,<독립운동가 최재형>,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위안부청소년소설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