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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생가지를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격동의 19세기 중엽, 양극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등이 제국주의로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일 때, 조선은 세도정치하에 백성들은 삶조차도 제대로 영위하기조차 힘들게 지배관료들과 왕의 외척들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이때 수운 최제우(1824~1864)는 경주시 현덕면에서 태어나 어리럽고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고뇌하며 고래로 전해오던 각종 사상을 섭렵하고 수도정진하였다.


그러던 최제우는 젊은 날 집근처 구미산 기슭에 있던 용담정에서 수도하던 중 37세 되던 해인 1860년 4월 5일 하늘의 계시를 받으며 무극대도의 도를 깨친후 새시대가 도래한다는 개벽을 선언하였다. 한 인간으로 깊은 고난의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어 도를 깨쳤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깨친 가르침을 펼치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들이 민란의 주동세력으로 커질 것을 염려한 조선의 지배층들은, 최제우를 민중선동의 누명을 씌워 1864년 3월 10일 41세의 나이에 대구성내에서 혹세무민의 죄를 쓰고 효수하고 말았다.


이후, 최제우가 세운 동학은 그의 뒤를 이은 2세교주 해월 최시형에 의하여 교리가 발전되면서 이어갔고, 누명을 쓰고 죽어간 교주의 억울한 죽음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며 그 교세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처럼 동학의 세력이 커지면서 동학의 지도자들은 교조신원을 넘어서 백성들을 괴롭히던 탐관오리 같은 목민관들의 죄를 다스려줄 것을 요구하고,  조선조 모순에 가득하고 낡아빠진 관습과 제도를 개혁하자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동학의 세가 커지자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탐관오리 숙청과, 각종 구습타파와 낡은제도의 개선을 약속하며 동학교도들의 요구에 타협하는 척 하다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주지 않기 위하여 그 자세를 돌변하여 동학탄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훈련도 안되고 이름뿐인 관군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게되자, 조선이 상국으로 여기던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청나라군대가 들어오자. 이를 빌미로,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위한다며 조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본군이 들어와 조선은 동학난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전장으로 전락하여, 청일전쟁의 발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자주성을 살실하고 친청 친일 친러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에는 제국주의 각국간의 세력다툼 속에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때 만약 동학혁명을 이끌던 선각자들의 의견을 제대로 받아들여 조선이 스스로 개혁을 이룩했더라면, 조선은 자주적으로 개화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비극적 역사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중심의 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신이 깨친 무극대도를 '동학'이라 명명하고 백성들을 이끌던 수운 최제우는 자신의 뜻을 펼치지도 못하게 억울하게 죽어갔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동학은 조선정부로 부터 탄압도 받았다. 조선정부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동학교도들을 외세에 의지해서라도 진압하f려고 하자 이들은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농사짓던 각종 농기구를 둘러메고 전장에 나아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다 충청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수만명이 죽어가는 비극으로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학이 태동한지 거의 100년이 지난 이후에야 그 숭고한 뜻을 다시 조명하고, 선각자 최제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화재로 사라진 수운의 생가를 복원하였으며, 이를 후세인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수운이 살아올 수는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라도 그의 뜻이 이렇게 추모됨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하며, 돌아본 수운 최제우의 생가 탐방이었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다"  라는 말이 있다 조선말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들어와 당시 사람들은 이러다 정말 세상이 종말로 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시련이 있었으나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당시를 생각하면 엄청난 시련을 잘 극복한  것 같지만 그 시련 속에 희생된 수 많은 선각자 지사 의사들이 많았다.


저절로 밝은 미래는 없다.  지금 국정 문란 사태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재다. 이 때 과연 한국민의 선택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 국정문란을 잘 극복하여 미래 후손들에게 못난 선조가 안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150년전 억운하게 산화한 수운 최제우 생가탐방을 마무리 한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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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