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실에서도 물론 근친혼을 했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 가족과 의식주, 송기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 따르면 고려시대 왕실에서 63건의 동족혼이 확인되고, 이 가운데 8촌 이내 근친혼이 70퍼센트에 달하였을 뿐 아니라 이복형제자매 간의 혼인도 10건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려 중기 권신이었던 이자겸(李資謙, ?-1126)은 권력을 독점하려고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들였고, 셋째와 넷째 딸은 예종의 아들인 인종의 왕비로 바쳤을 정도입니다. 자매 사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로 바뀌었을 뿐만이 아니라 남편이 같은 동서 사이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풍속이 고려 후기에 와서 동성 사이 혼인을 금지하게 됩니다. 《고려사》 충선왕 복위년(1308) 기록에 보면 “내가 원나라에 갔을 때에 세조(쿠빌라이칸)의 뜻을 받았는데, ‘동성 사이에 통혼하지 않는 것은 온 천하의 공통된 윤리다. 하물며 당신의 나라는 문자를 알고 공자의 도덕을 실천하고 있으니 마땅히 동성 사이는 혼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제부터는 만일 종친 가운데 동성끼리 혼인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세조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죄를 물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는 근친혼은 물론 동성혼도 하지 않는 풍속으로 바뀌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