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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핏덩이를 안고 광복군이 되어 뛴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어제(31일) 오후 2시,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생존 독립운동가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었다. 올해 92살의 유순희 애국지사는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지만 흔쾌히 기자의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려고 했던 것은 5년 전부터 지만 그때마다 몸이 안좋으시다고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셔서 줄곧 찾아뵙지 못하다가 어제 간신히 뵙게 된 것이라 기자는 더욱 기뻤다.


어제 유순희 지사님을 함께 찾아 뵌 분은 생존 독립운동가이신 오희옥(92살) 지사님 이었다.  오희옥 지사님과 유순희 지사님은 서로 왕래를 하시던 터였지만 몇 해 전부터는 유순희 지사님의 건강이 날로 안 좋아 번번이 방문 계획이 취소되곤 했던 것이다. 수원에 사시는 오희옥 지사님을 모시고 서울의 끝자락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유순희 지사님 댁을 찾아 나선 길은 메마른 대지 위에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파트 주변에 심은 산수유 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유순희 지사는 광복군 제3지대에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활동한 광복군 출신이다. 그의 나이 열여덟 때의 일이니만치 벌써 73년 전의 일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고 계시는 틈에 기자는 거실 벽면에 걸린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발견하였다. 유리액자를 떼어 유 지사님 손에 들려드리자 막혔던 말문이 터지듯 73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들려주셨다.


흑백사진은 해방되기 1개월 전인 1944년 7월에 찍은 사진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들이었는데 유순희 지사는 맨 앞줄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뿔사! 그런데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이 제 아들이에요. 갓 낳은 핏덩이가 지금 일흔을 넘었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지요.” 라며 유순희 지사는 당시 유일한 유부녀 광복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대원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갓난쟁이 아들 이름은 광삼(光三)으로 부대원들이 광복군 제3지대를 상징하는 뜻에서 지어주었다고 했다. 그 어린 광삼이를 안고 유순희 지사는 당당한 광복군이 되어 뛰었던 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重慶)에서는 조선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있는 일제를 몰아내고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가 창립된 것이다. 광복군은 4개 지대(支隊)로 편성하고 각 지대 내에 3개 구대(區隊)를 두고, 다시 각 구대 내에 3개 분대(分隊)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활동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광복군의 부대 편성 과정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도 부대원을 확보하는 일은 큰 걸림돌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남의 땅에서 군대조직을 꾸린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닐 수 밖에 없다. 다행히 1942년 4월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함에 따라 2개 지대의 편성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광복군총사령부는 1942년 2월 김학규(金學奎)를 산동성(山東省)으로 특파하여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당한 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招募工作)을 전개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김학규는 양자강 이남의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머물면서 3년 남짓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순희 지사는 1944년 11월 중국 하남성(河南省) 녹읍(鹿邑)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방 특파원 조성산(趙城山)과 접선하여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2월 김학규가 이끄는 광복군 제3지대 화중지구(華中地區) 지하공작원 윤창호(尹昌浩)로부터 광복군 지하공작원으로 임명받았다. 그 뒤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뒤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활약한 것이다.





“유 지사님! 이런 갓난아기를 안고 정보활동을 하셨다니 굉장히 위험했겠어요. 만일 아기가 울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기자의 질문에 유순희 지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쩌겠는가! 갓난아기를 안고라도 광복군에 뛰어들 수밖에 없던 상황을 어찌 지금의 시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이애라 (1894~1922) 지사가 갓난아기를 업고 독립운동을 하다 아기가 우는 바람에 서울 아현동에서 잡혀 아기가 죽음을 당한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광복군 제3지대 부대원들이 지어준 어린 핏덩이 광삼(光三)이와 유순희 지사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행복했다. 아이 아빠가 같은 부대원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광삼이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최시화(崔時華, 1921~?)씨로 당시 나이 24살이고 유순희 지사의 나이는 19살이었다.


금슬 좋은 광복군 동지 출신의 부부 독립운동가 유순희 지사는 불행하게도 환국 후, 남편과 6·25전쟁으로 헤어지게 된 뒤 홀로 어린 세 자녀를 키워야하는 운명과 맞닥트렸다. 길고 긴 고난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유 지사는 꿋꿋하게 자녀들을 키워냈다. 지금은 손녀딸(둘째 아드님의 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손녀딸이 딸기 등 과일 준비를 하는 동안 유순희 지사는 한국광복제3지대의 활약상이 담긴《항일전의 선봉》이란 앨범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1982년에 한국광복군제3지대사진첩발간회에서 만든 흑백사진첩 속에는 유순희 지사를 비롯한 수많은 광복군들의 활동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유 지사는 또렷하게 당시를 기억하는 듯 손가락으로 한 분 한 분을 가리키며 설명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동지이자 남편인 최시화 지사의 사진이 나오자 감회에 젖는 듯 멈칫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유 지사가 활동하던 흑백 사진 속의 세월은 어느새 73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의 나이 92살! 참으로 무정한 세월이었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어린 핏덩이를 안고 광복군에 뛰어든 시절부터 환국하여 또 다시 겪은 민족의 비극 6·25전쟁, 그 전쟁에서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어린자식들을 부여잡고 살아온 세월!


“정말이지 내가 92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유순희 지사는 기자가 사들고 간 안개꽃 화분을 지그시 바라다보며 마치 안개속 같았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듯 했다. 이날 기자와 함께 유순희 지사 집을 찾은 오희옥 지사는 유순희 지사와 동갑이지만 건강이 조금 나은 편이라 높은 연세에도 각종 기념식이나 독립운동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신다.


현재 생존한 여성독립운동가는 유순희, 오희옥, 민영주 지사 세 분 뿐이다. 이제 이 분들에게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니 두어 시간 대담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유 지사님, 햇살 고운 가을날, 오희옥 지사님이 수원에서 용인의 마당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나면 제가 모시러 올게요. 함께 나들이해요.”라면서 기자는 두 손을 꼭 잡아 드렸다.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수척한 모습의 유순희 지사와의 대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왠지 코끝이 찡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계 바늘이 얼마를 기다려줄 지 모르는 세월 앞에서 그저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는 말 밖에는 건넬 수 없다는 사실이 눈시울을 붉게 했다.


참고로, 남편 최시화 지사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유순희 지사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이 시대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할 부부 독립운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