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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깊은 산속의 정적과 아버지 / 류금화

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소름이 오싹 끼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무서운 정적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홀로 산길을 걸을 때나 어두운 밤 빈집에 혼자 있을 때처럼 말이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나는 늘 아버지를 따라 산속을 다니면서 그런 정적을 신물 나도록 느꼈다.


내가 철이 들면서 언니들은 시집갔고 엄마는 집안일에 돌아치다보니 아버지 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늘 아버지한테 불리워다니곤 했다. 어느 해인가 아버지는 손수레 한대를 샀다. 그날 동네사람들이 손수레를 빙둘러 싸고 마치 오늘날 고급승용차를 산 것처럼 구경할 때 아버지가 흥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 손수레는 아버지의 딱친구로 되였다. 봄에는 밭을 일구고 여름에는 김도 매고 나물도 캤으며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땔나무도 할겸 산토끼며 꿩도 잡았다. 그런데 길 떠날 때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불러 손수레에 앉히고 갔다. 손수레 앞뒤무게를 조절하기 위해서였을까? 하여튼 그 시절 나는 아버지랑 일 나가는 것이 두렵고 싫었다.

 

가는 길은 그래도 덜컹거리는 손수레에 앉아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산속에 도착 하면 한없이 지루하고 고독한 시간이 시작된다. 아버지가 늘 나더러 손수레 옆에서 놀게 하고는 혼자서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적적하여 김매는 아버지를 쫓아다니고 싶었지만 손수레를 지키고 있으라는 아버지의 어명에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곤 했다.


아버지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분이섰기에 나는 손수레에 앉은 채 눈도 깜박 하지 않고 김매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몸을 웅그리고 열심히 김매는 아버지는 점점 멀어져 한 점의 빛이 되여 아물거리더니 이내 산비탈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 뒷모습이 사라지는 동시에 나의 귀가에는 뻑국뻑국 뻑국새소리, 까욱까욱 처량한 까마귀 울음소리, 스르락스르락 선들바람이 나무잎새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고 숲속은 이내 쥐 죽은 듯 한 정적 속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마음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하고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면서 조여들기 시작한다, 당금이라도 뭔가 뒤통수를 칠 것같은 느낌에 소름이 온몸에 쫙 퍼졌다. 그 후에도 가끔씩 아버지는 산비탈너머로 사라졌고 그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무서운 정적 속에서 버텼다. 나는 두려움을 덜려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창공을 바라보면 조금이나마 두려움이 가셔졌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하늘을 향해 외우고 또 외웠다.


"하늘이여 들으소서. 아버지가 빨리 나타나게 해주소서"



 

한동안 지나서야 비탈너머로 아버지의 모습이 콩알만큼한 점으로 보이더니 차츰차츰 커지기 시작한다. 그때 아버지 모습은 나에게 구세주마냥 반가웠다.


어느 날, 아버지는 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를 깨웠다. 이미 간밤에 어머니 보고 "집에 비가 새니 래일은 새를 베다 얹어야겠소."하시던 말씀을 엿들었던 터라 나는 못 들은 척 잠자코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넘길까 오만가지 궁리를 다하고 있었다. 한참후 "안 일어 나냐?"는 아버지의 호령소리에 잔머리꾀가 싹 날아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코 꿰운 송아지마냥 아버지의 뒤를 따라나설 수 밖에 없었다.

 

산중턱에 이르러 아버지는 평소처럼 손수레를 지키라 하고는 돌아섰다. 또다시 홀로 무서운 정적과 싸울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 났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아버지보고 새단을 나르겠다고 자청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돌아섰다. 아버지가 허락하거나 말거나 나는 아버지가 새를 베여서 단을 묶으면 씩씩거리면서 손수레 있는 데까지 메여나르기 시작했다. 비록 힘들었지만 아버지 그림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정적에 몸서리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얼굴이 빨개서 할닥거리면서 달아 다니는 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없이 일손을 멈추고는 담배쉼을 하였다. 힘든 내 마음 알아 주신걸가? 그 순간 아버지가 너무나도 고마 왔다. 자청해서 새단을 나르겠다고 했으니 힘들었지만 꾹 참고 입 뻥긋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조금만 늦으면 아버지 그림자가 숲속에서 사라지니깐. 그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나에게는 없는 듯하다. 어느새 아버지는 새단을 묶어 손수레에 넘쳐나게 싣고 떠날 차비를 했다. 나는 예전과 같이 새단을 타고 손수레에 올랐다. 새단속에 파묻힌 나는 피곤한 나머지 곤드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새단속에 파묻혀 땀을 흠뻑 흘리며 자다가 눈을 떠보니 집 앞이었다. 나는 선잠에서 깨여나 휘청거리면서 집에 들어가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그러다 잠결에 온몸이 달아오르고 뼈마디가 쿡쿡 쑤셔나 끙끙 앓았다. 12시 되여서야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내 앓음소리를 듣고 후다닥 방에 들어왔다. 눈을 꼭 감은 나는 아버지의 큰 손이 나의 이마에 닿는 것을 감촉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실 끊어진 구슬마냥 쭈루룩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말없이 큰 손으로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 주시더니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나를 들쳐업고 뛰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나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아버지의 넓은 등이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했다. 아버지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르신지 등에 업힌 나는 마치 말 등에 탄 것처럼 들썩거렸고 내가 그 따뜻함을 더 느끼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병원에 도착하였다.


그 순간 나는 "병원이 더 멀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날 정도로 못내 아쉬웠다. 병원에 도착하여 체온을 재보니 39도였다. 의사는 의아한 눈길로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린애가 이 지경으로 열이 나는데도 눈이 초롱초롱하니 대견스럽네요."
그 말에 아버지는 자랑스레 대답했다.

"애라구 보지마십시오.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된 감기에 걸린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방에 누웠었다. 그날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 왔다. 두 사람이 한참 얘기를 나누던 중 아버지는 어제 산에 갔던 일을 꺼내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혼자 산에 다니면 너무 적적한데 옆에 작은 애라도 데리고 다니면 적적하지 않아서 좋았다네."

그 말에 아버지의 친구는 맞장구를 쳤다.

"나도 절대 홀로 산에 못 간다오. 병다리 마누라라도 데리고 가서 말벗이라도 되여 주어야 적적하지 않다네.“

 

두 분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가 일축도 못 내는 나를 왜 데리고 다녔는지 알게 되였다. 인기척 없는 깊은 산속의 홀로는 깨뜨릴 수 없는 무서운 "정적". 그런 정적을 나뿐만 아니라 호랑이 같은 아버지도 두려워했다니! 내가 곁에 있어 줌으로써 아버지가 그 소름 끼치는 "정적"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간 터득한 나는 아버지께 기쁨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반에서 첫 사람으로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농촌에 내려가서도 집체호에서 첫 사람으로 입당하였다. 나는 이런 희소식을 아버지한테 전하여 아버지가 고달픈 일상과 마음속 깊은 곳의 정적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는 나의 삶에 든든한 힘이 되였고 나의 존재 또한 아버지께 말로 표달할수 없는 활력소가 되었던 것 같다. 내 나이 반평생에 접어들면서 그때의 아버지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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