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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하와이 대한인부인회장 황마리아를 찾아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길

[우리문화신문=하와이 이윤옥 기자] 와이키키 해변의 고운 백사장에는 4월 16일(현지시각)인데도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 탓인지 비키니 차림의 해수욕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와이키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와이 최초의 이민선이 갤릭(Gaelic)호가 닿았던 선착장에 들렸다가 와이키키 쪽으로 걸어 보았다.


 와이키키해변 주변 공원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싫증이 나면 바닷물로 풍덩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는 하와이 사람들을 바라다보면서 114년전 이민선을 타고 낯선 땅에 내려 고생길로 접어들 사탕수수 밭으로 향했을 선조들을 떠올렸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갤릭호에는 101명의 한인이 타고 있었는데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을 위해 건너왔다. 첫 이민선이 뜬지 2년 뒤인 1905년 4월, 여성독립운동가 황마리아 (1865~ 1937)지사도 고국 평양을 떠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릭선편으로 하와이 노동이민의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큰딸은 19살(강혜원)이었으며 17살이었던 아들 강영승의 노동이민에 가족이 동반하는 식으로 이민 길에 나선 것이었다. 무려 한 달여의 길고 긴 항해 끝에 황마리아 가족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5월 13일이었다. 이들은 하와이 가피올라니(Kapiolani) 농장과 에와(Ewa) 농장에 소속되어 고달픈 이국땅에서 사탕수수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낮이면 사탕 밭에서 살고 밤이면 농막에 들어가 밤을 지낼 때 피곤한 몸의 사지가 아프고 결려서 누었거나 앉았거나 편치 안 해서 전전 불매하던 것이 그들의 정경이었다. 그러한 형편으로 매일 10시간 일하고 69전을 받아 그날그날을 지냈으며 그같이 한숨과 눈물에 젖은 노력이 재미한인사회 건설과 조국광복 해외운동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재미한인 50년사, 김원용 지음》혜안, 2004-




이국땅 낯선 환경의 사탕수수 밭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이들 이민자들은 고국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참에 들려온 일제의 조선 침탈소식은 청천벽력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국땅이라해서 조국의 참상에 눈 감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황마리아 지사는 경술국치를 당한 3년 뒤인 1913년 4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서게 된다.

 

좀 더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진 계기는 1919년 조국의 3.1만세운동이었다.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진 2주 뒤 황마리아 지사는 1919년 3월 15일,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 대표 41명을 모아 호놀룰루에서 공동대회를 열고 조국 독립운동의 후원을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를 다시 결성했다. 이들은 3월 29일, 제 2차대회의 결의안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조국독립운동 후원의 목적으로 하와이 각 지방의 한국 부녀를 규합하고 부녀 사회의 운동역량을 이에 집중한다.






둘째, 조국독립운동에 대하여 부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에 봉사하되 우선 독립운동 후원금 모집에 착수할 것이며 항일군사운동이 있을 경우에 출정군인 구호사업의 준비로 적십자 임무를 연습하며 재난 동포 구제에 노력한다. 셋째 조국 독립운동과 외교 선전에 대한 후원방침에 대한민국국민회 지도에 따라서 진행한다. 이 결의안에 따라 하와이에서는 1919년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가 설립되었다.


이 모임의 재정은 회원으로부터 회비 2달러 50센트를 매년 받아서 경상비로 쓰고 사업경비는 특별의연금으로 충당하였는데 이는 부녀들이 가정살림을 절약하여 애국사업에 바친 것으로 그 액수는 무려 20만달러에 이르렀다. 이들의 활동은 크게 독립운동자금 지원과 구제사업 활동이었다. 독립운동자금 지원은 임시정부와 외교선전 사업에 후원금을 보내는 한편 군사운동을 위하여 만주의 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총사령부 출정 군인에게 구호금을 보냈다. 또한 중경의 광복군 편성 후원금도 보냈다.





구제사업으로는 3.1만세운동 때 부상을 입은 애국지사의 가족에게 구제금 1500달러를 보냈으며 국내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YMCA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구제금을 보내 고국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나눴다.


황마리아 지사는 2017년 3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앞서 황마리아 지사 따님인 강혜원(1886~1982,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과 사위 김성권 (1875~1960,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 며느리 강원신(1887~1977,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먼저 서훈을 받았다.


황마리아 지사가 딸이나 사위, 며느리 보다 늦게 서훈자가 된 것은 하와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조명이 미주 본토 보다 더디게 이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황마리아 지사 외에도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한 여성들에 대한 조명이 하루 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2017년 3월 현재 하와이 지역 여성독립운동가 서훈자는 황마리아 지사를 포함하여 모두 5명인데 황마리아 지사를 포함하여 전수산(1894~1969, 2002년 건국포장), 박신애(1889~1979,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 초기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진출), 강혜원(1886~1982, 황마리아 지사 딸로 후에 미 본토로 진출), 심영신(1882~1975,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다.


한편, 따님인 강혜원 지사는 어머니 황마리아 지사와 함께 하와이로 건너와 가피올라니(Kapiolani) 농장에 배치된 뒤 일과 병행하여 하와이 마노아벨리(Manoa Valley) 여학교를 다녔다. 그 뒤 북미 중가주 롬폭(Lompoc)에 거주하는 김성권과 약혼하고 1913년 10월에 북미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이주해 12월 9일 혼인, 다뉴바(Dinuba)에 정착하였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방으로 먼저 이주한 강원신 지사와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하면서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원신·한성선·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여 다뉴바 지방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1939년 12월 27일, 제8대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단장에 선출되어 1942년 1월까지 대한여자애국단을 지도하였다. 한편 중일전쟁 때 송미령에게 중국군 솜옷 지원 의연금을 보내고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미국 전시공채를 매입하는 등 적극적인 전시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흡수 통합하자, 남편 김성권과 함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여 진보적 노선 편에서 활동하였다.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참석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임시정부 지원 모금과 재정지원 확보 활동을 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마리아 지사의 사위 김성권은 1904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이민하여 오하우(Ohau) 에와(Ewa) 농장에 배치되어 일하면서 1906년 5월부터 1년간 기관지 '친목회보(親睦會報)' 주필로 필봉을 휘두르며 한인들의 결속과 애국정신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07년 3월부터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여 같은 해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24개 한인단체 합동발기대회를 열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기관인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는 산파역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안창호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共立協會) 찬성원으로 가입하는 한편,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자격으로 1908년 7월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 등이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에 참석하는 등 1909년 2월 미주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국민회(國民會)를 탄생시켰다.


이와 같이 황마리아 지사는 딸과 사위 그리고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조국 독립의 초석을 이뤘다. 척박한 하와이 이민노동자이면서도 식민지로 전락된 조국을 외면하지 않고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조국 독립에 앞장섰던 황마리아 지사의 하와이에서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기자는 깊은 감격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