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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하와이 공원묘지에 잠든 여성독립운동가 전수산 (2)

호놀루루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를 찾아서

[우리문화신문= 하와이 이윤옥 기자]


 


전수산 지사를 그리며

                            -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에서



          먼 이국땅서 잠든 그대

          극락조화 한 다발 안고 찾아간 날


          무덤 뒤

          다이아몬드헤드산은 빛났고

          와이키키 바다 바람은

          뺨을 간지럽혔다오


          어린 딸 옥희를 안고

          하와이땅 밟은 그대


          억척스레 독립자금 모아

          상해임시정부의 기틀을 잡고

          헐벗은 조국의 애국지사 후손을 도운

          고운 마음 고이 감추고


          이제는 지친 몸 마음 모두 내려놓고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에서

          조국의 무궁함을 비는 그대여!


          독립의 역사 지워지지 않는 한

          그대의 애국혼 영원하리라!  


                                                         - 이윤옥 -




전수산(1898~1969)애국지사가 잠든 호놀루루의 다이아몬드헤드 공원 묘지(DIAMOND HEAD MEMORIAL PARK)를 찾은 시각은 18일 아침 10시(현지시각)였지만 이미 태양은 한여름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봉분이라든가 묘지석이 없는 미국의 공원묘지는 그야말로 하나의 공원(PARK)처럼 평온한 곳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푸른 잔디밭 같지만 자세히 가보면 바닥에 묻힌 사람의 작은 묘지석이 박혀있다. 전수산 지사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날(13일, 현지시각) 외손자인 티모시 최 선생을 만나 무덤의 위치를 알아내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워낙 넓은 곳이라 찾을 길이 없어 무덤 관리소에 들려 위치를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전수산 지사의 무덤은 남편 이동빈(1898~1947) 선생과 나란히 있었는데 공원묘지의 입구로부터 치면 중간쯤인 섹션 D-79-1과 3에 자리했다. 관리인이 약도에 그려준 위치를 참고하니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 여기가 전수산 지사의 무덤이런가!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공원묘지인지라 주변에 꽃을 파는지 알고 빈손으로 달려갔다가 꽃을 팔고 있지 않아 무덤을 확인하고 다시 차로 십여분 거리에 있는 마켓으로 달려가 극락조화 한 다발과 이름 모를 하와이의 아름다운 꽃 한 다발을 샀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빛났다. 독립의 역사에서 비껴있던 하와이의 독립운동가 전수산 지사의 삶이 순간

강렬한 빛으로 다가섰다. 그 빛을 새기며 기자는 무덤 앞에 마련된 작은 물통 안에 사온 꽃을 정성껏 바치고 큰절을 두 번 올렸다


두 번의 절 가운데 한번은 먼 이국땅 하와이에 건너와 대한부인구제회 회원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조국의 애국지사 후손들을 돕고자 뛴 전수산 지사에게 올리는 절이요, 또 한 번의 절은 전수산 애국지사처럼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져간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한 분도 빠짐없이 세상에 알리겠다는 각오의 마음이었다.





전수산 지사는 평양출신으로 1916년에 건너왔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공채를 발행하게 되자 전수산 지사는 당시 돈으로 15불 상당의 공채를 매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어 1919년 4월 1일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창립된 하와이 부인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 회원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를 돕는데 앞장섰다.


머나먼 하와이 땅에 건너와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조국에 독립자금을 보내던 여성들은 대관절 어떤 절차를 거쳐 하와이에 건너왔을까? 특히 전수산 지사가 하와이로 건너올 무렵에는 이미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게 강점당해 대한제국 국민은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린 때였다. 따라서 전수산 지사는 일본 여권을 가지고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땅을 밟아야했다.


1910년 무렵 이곳 하와이 땅에는 이른바 남편 얼굴도 모른 채 사진신부로 들어온 여성들이 많았다. 1910년 12월 2일 첫 한인 사진신부 최사라 (당시 23살) 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수산 지사는 사진신부는 아니었다. 하와이에 먼저 와 있던 남편 유경상과 합류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여권을 발급 받아 온 것이었다. 전수산 지사의 여권은 ‘일본제국 해외여권’으로 일본 외무성이 1916년 2월 3일에 발급한 것이다.




전수산 지사가 하와이에 건너올 무렵에는 이미 국권이 일제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여권을 보면 전수산 지사의 주소는 경성부(서울) 초음정 23번지이며, 유경상의 처라고 되어있고 3살 된 딸 옥희의 이름이 함께 적혀있는 이른바 가족여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의 이민법(1924년)이 정비되지 않은 시기라 호눌루루 항에 입항하고도 바로 입국을 하지 못한 채 항구에서 대기해야했다.


이덕희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전수산 지사의 여권에 ‘일본 배 신요마루 1916년 6월 19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고 연필로 기입되었고, 하와이 영토 호놀룰루에 입항 허락이 내려진 날자가 1916년 6월 21일로 이민국 직원의 사인이 있다.”고 했다. 만 2일만에 입국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당시 이민자들은 배에서 작성한 서류에 이민자의 이름, 성별, 나이, 결혼상태, 마지막 주거지, 도착일자, 도착 선박이름, 도착지 등을 적어야 했고, 또한 이민자의 직업, 글을 읽고 쓸 수 있는가, 지참한 돈은 얼마인가, 전에 미국에 입국한 적이 있는지 등등을 기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작성된 서류를 토대로 호놀루루항에서 며칠이고 입국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한 뒤에 입국이 허가되었다.


마침, 지난 15일(현지시각) 토요일 오후 10시 하와이 호놀룰루 그리스도연합 감리교회 북카페에서는 이덕희 소장의 <역사세미나(4) 여권(PASSPORT)> 강좌가 열렸다. 기자도 참석하여 초기 한인이민자들의 여권에 관련된 소중한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참석자 가운데는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며칠은 아니지만 몇 시간씩 입국허가를 받을 때까지 대기했다고 했다.




지상낙원이라는 하와이 땅은 지금 관광으로 한국인들이 쉽게 찾는 곳이지만 100여 년 전 이 땅을 밟은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빼앗긴 조국에서 여권조차 일본외무성 발행 여권으로 입국해야했으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애초부터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초기 이민자들은 그러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으로 일어나 이 땅에 한국인의 의지를 확고히 심었다. 특히 상하이임시정부에 아낌없는 후원으로 조국의 독립에 초석을 놓았으니 그 노고와 공로를 어찌 말로 다하랴!


 무덤을 돌아보면서 음지에서 묵묵히 독립자금을 모으며 조국독립에 커다란 기틀을 마련한 전수산 지사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 또한 전수산 지사와 더불어 하와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헌신도 함께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전수산 지사는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전수산 지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4월 15일치, 하와이 여성독립운동가 전수산 지사를 찾아서 참조)


*전수산 지사 무덤: Diamond Head Memorial Park, 529 18th Evenue,  Hawaii 96816, 무덤위치 : D-79-1(전수산 지사), 3(남편 이동빈  선생) ,  전화: 808-734-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