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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힘들게 돈 벌어 독립운동자금 댔던 사탕수수밭 마을을 가다

하와이 와이파후플랜테이션 빌리지 내 한국자료관 일본어 안내판

[우리문화신문=하와이 이윤옥 기자]


 


와이파후 사탕수수밭에서


                                                            -  이 윤 옥


          오하우섬 와이파후 사탕수수 공장 굴뚝

          우뚝 솟은 곳 아래

          옹기종기 모여 둥지 튼 조선인들


          그리운 고향 떠나 올 때

          고이 간직한 흑백사진

          철지난 영화 포스터처럼 걸려있는

          좁은 방마다 물씬 묻어나는 고향의 정경


          빼앗긴 나라 소식에

          울밑에 봉선화 심고

          초여름이면 손톱에 붉은 물들이듯

          끓는 피 가슴에 넘치던  처녀들

 

          뙤약볕 사탕수수밭 중노동에

          시달려 받은 돈

          독립자금에 선뜻 내어

          나라 살린 그 마음


          임들은 비록 갔지만

          판잣집 울안 붉은 봉선화 꽃

          오늘도 붉게 피어

          임들의 뜨거운 피 전하고 있네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Hawaii's Plantaion Village)는 한국, 중국, 하와이, 일본, 필리핀, 오키나와, 포르투갈, 푸에르토리칸 8개 소수민족의 이민 선조들의 삶을 한 곳에 엿볼 수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각국의 노동이민자들의 집 한 채씩을 지어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 민속자료관 같은 곳이다. 19일(현지시각) 오후 2시 플랜테이션 빌리지를 찾았을 때는 거의 찾는 이가 없이 몇몇 관리인들이 주택 주변의 풀을 뽑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100여 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이 도착했을 무렵만 해도 이 일대는 어디를 가나 사탕수수 밭이었겠지만 지금은 이 주변 어디에고 사탕수수 나무 한그루 구경하기 힘들다. 조선인 가옥 근처 땅 바닥에는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밝은 사회 국제 하와이 클럽>에서 새겨둔 “한국인 초기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이 여기에 - 한국인 미국이민 일백주년을 기념하여 이천삼년 일월 삼일” 이라는 동판이 새겨져 있어 찾는 이의 가슴을 뭉클케 한다.


당시 조선인 가옥이라고 재현해 놓은 집 현관에 들어서자 작은 거실이 하나 있고 옆에 작은 부엌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는 작은 방 두 개가 있었는데 그 규모는 매우 작아 이곳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의 숙소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방에는 고국에서 가져온 부모님의 사진 또는 형제자매의 흑백 사진과 반닫이, 치마저고리, 다듬잇돌, 갓 같은 것이 전부였다. 부엌살림 역시 무쇠 솥 하나가 걸려있고 채반 두어 개와 밥그릇 정도로 이렇다 할 변변한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멀고먼 남의 땅에 노동자로 입국하면서 가져올 반반한 물건이 무엇이 있었을까 싶다. 첫 이민자가 하와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03년의 일이다. 여성독립운동가로 활약한 황마리아 (1865~ 1937)지사도 고국 평양을 떠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릭선편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이민의 첫발을 내딛었다.





1910년에 4500여명에 이르던 조선인들은 고통스런 중노동에도 억척스레 일을 하여 고국의 동포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에 이른다. 특히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이른바 사진신부로 사탕수수농장으로 건너온 여성들은 800여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남편을 도와 이국땅에서 근면 성실함으로 어려운 환경을 이겨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대한인부인회(1913년), 대한부인구제회(1919년) 영남부인실업동맹회(1928), 대한부인국민회(1949년)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고 조국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플랜테이션 빌리지를 돌아보면서 아쉬운 것은 ‘한국인의 집’ 설명을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와 영어로 설명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어 설명도 “이 집은 오키나와인의 집 구조와 닮아있습니다. 집 구조는 유사하지만 ‘청결한 부엌’을 유지하기 위해 장작이 아니라 등유를 연료로 쓰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대관절 일본 집도 아닌 조선인(한국인) 집에 대한 설명을 왜 한국어로 써놓지 않고 일본어로 써놓고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와이 와이파후의 플랜테이션 빌리지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살고 있는가 싶었다. 일본 집 설명이야 일본인들을 위해 일본어로 쓴다지만  한국인 집이나 기타 포루투칼 집, 심지어는 푸에르토리코 집도 일본어로 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씁쓸하다.


플랜테이션 빌리지 측은 해당국 언어로 하루 속히 안내판을 바꾸어주어야만 할 것이다. 영어는 기본적으로 되어 있으니 각국 노동자들이 살았던 숙소 안내판만이라도 의당 한국어, 중국어, 필리핀어, 포르투칼어 등으로 표기해야한다. 사탕수수밭 노동도 서러운데 재현해 놓은 자료관 안내판 마저 일본어 일색이니 재고할 문제다. 


*주소: Hawaii's Plantation Village  •  94-695 Waipahu Street  •  Waipahu, HI  96797, tel: (808) 677-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