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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사진신부 심영신,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되다

하와이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방을 둘러보아도 (임시)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름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연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가 해외에 있는 만큼 해외 동포들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318쪽

 

백범 김구 선생이 꾸려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세 들어 살던 집세가 밀리기 시작하여 조국 광복의 꿈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광복을 이루고자 큰뜻을 품고 세운 임시정부의 활동은커녕 이제 그 이름조차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은 미주, 하와이,멕시코, 쿠바 등에 사는 동포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하와이의 여성독립운동가 심영신 지사와 박신애 지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그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다.

 

 

나의 통신(하와이 동포들에게 쓴 편지)이 진실성이 있는데서 점차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하와이의 안창호 (여기 안창호((安昌鎬)는 도산 안창호(安昌浩)와는 다른 인물로 하와이 국민회 계통 인물이다.), 가와이, 현순, 김상호, 이홍기, 임성우, 박종수, 문인화, 조병요, 김현구, 안원규, 황인환, 김윤배, 박신애, 심영신 등 제씨가 나와 (임시)정부에 정성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320

 

백범 김구 선생은 하와이 동포들이 십시일반으로 임시정부에 보내온 독립자금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이름으로 남겼다. 물론 더 많은 동포들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지만 위 기록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심영신 지사다.

 

기자가 하와이 출신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지난 413일부터 21일까지 하와이에 직접 건너가 그 활동상황을 추적하는 가운데 찾아낸 분이 심영신 지사이기에 백범일지 에서 심영신이름 석 자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남달리 컸다.

 

 

1997년에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심영신(沈永信, 1882. 7.20~1975. 2.16) 지사는 이른바 하와이 사진신부의 한 사람으로 건너간 분이다. 심영신 지사는 황해도 송화(松禾)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닌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 하나를 둔 과부가 되었다. 과부의 상태에서 심영신 지사는 하와이에 진출해 있던 조문칠과 사진신부로 맞선을 보고 아들과 함께 하와이 땅을 밟은 것이다. 

 

1916년에 하와이에 건너갈 무렵 심영신 지사는 34살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을 뿐 아니라 한번 결혼한 경험이 있고 어린 아들까지 딸렸지만 남편 될 조문칠은 선뜻 심영신 지사를 신부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들인 노총각의 결혼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농장주들도 한인 노동자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미혼 남성들의 결혼을 적극 추진하던 때였다.

 

 



하와이지역 사진신부의 첫 기록은 국민보1910126일치에 이내수와 약혼한 한국 부인이 도항하였는데, 민찬호 목사가 이민국으로 가서 혼례식을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로 보아 사진신부의 하와이행은 1910년부터 시작되어 1911년 무렵부터 본격화 된 것으로 보인다. 심영신 지사는 초기 사진신부 보다는 5년 늦은 1916년에 하와이행에 합류하게 되는데 당시 일반적이던 중매쟁이를 통해서였는지 아니면 열심히 다니던 교회를 통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렸을 때 백범 김구 선생과 앞 뒷 집에 살았던 인연이 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자금이 필요하다는 김구 선생의 편지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누구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독립자금에 앞장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심영신 지사는 하와이 여성단체에서 맹활약했던 만큼 상해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던 김구 선생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사진 신부들은 17살에서 24살 정도가 평균 나이였으나 더러는 앳된 소녀티를 갓 벗은 15살 또는 중년의 40살짜리 신부도 있었는데 심영신 지사는 신부나이 치고는 좀 많은 편이었다. 당시 하와이 총각과 조선의 사진 신부를 연결해주는 사람은 중매쟁이들로 그들의 역할은 컸다.

 

중매쟁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보면 우리가 중매쟁이에게 불평을 하기 시작하자 중매쟁이는 주머니에서 계속 사진을 꺼냈는데 그 사진은 아주 젊은 사람부터 늙은 사람까지, 미남에서 추남까지, 날씬한 사람에서 뚱뚱한 사람까지 여러 남자들이었다. 중매쟁이는 우리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중에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면 내가 그 남자에게 네 사진을 갖다 주겠다. 그리고 서로가 결혼에 합의하고 신랑될 사람이 결혼 준비금과 교통비를 제공하면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와이 한인 이민 1: 그들 삶의 애환과 승리》, 웨인 패터슨 지음, 정대화 번역, 2003, 들녘-

 

그렇게 해서 건너간 신부들은 실제 사진과는 다른 신랑들을 만나 더러는 적응을 못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억척스레 황무지를 개척하듯 하와이땅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일을 한 결과  나름대로 자리잡아 가면서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심영신 지사를 비롯하여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건너간 여성들은 대략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최대 1천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심영신 지사는 그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미주 하와이에서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국 독립에 힘을 실어 주었다.  대한인부인회는 심영신 지사가 하와이로 건너가기 3년 전인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한인사회의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황마리아 등이 세운 여성운동단체다.


 대한인부인회는 자녀의 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를 주요 행동지침으로 삼았는데 심영신 지사도 이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특히 1919년 고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심영신 지사는 국내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대표자를 소집하는 부녀공동대회 개최에 앞장섰다. 그들은 이 대회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대한 후원을 결의하였다.


  또한 심영신 지사는 1920년대 말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주석으로부터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고 하와이의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한편 자금모집에 앞장섰다. 그러한 내용을 백범 선생은 그의 백범일지에 빼놓지 않고 그 고마움을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414월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하여 이 대회에서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으로 뽑혔다. 여기서 심영신 지사는  임시정부 후원을 비롯하여 대미외교와 선전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솔선수범하는 삶을 살았다.


심영신 지사를 비롯한 초기 하와이 이주자들의 삶의 현장을 보기 위해 와이파후에 있는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Hawaii's Plantaion Village)를 찾은 것은 419(현지시각)이었다. 이곳은 한국, 중국, 하와이, 일본, 필리핀, 오키나와, 포르투갈, 푸에르토리칸 8개 소수민족의 이민 선조들의 삶을 한 곳에 엿볼 수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당시 각국의 노동이민자들의 집 한 채씩을 지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하고 있는데 조선인 가옥을 재현해놓은 방에 들어서자 가슴이 뭉클했다.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삶이란 것은 구태여 그 현장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를 입증하듯 당시 하와이 노동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03년에 하와이에 오셨는데 순전히 돈을 많이 모을 수 있다는 소문만 믿고 오셨다. 하와이에는 돈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나무가 있다더니 돈나무는 커녕 가보니 사탕수수밭 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열심히 일하여 수입을 모아도 1년에 겨우 50달러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겨우 5식구가 먹고 지낼 정도였다. 상당수의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 일의 고단함과 희망이 없는 생활을 청산하고자 본토행을 택했다. 하지만 하와이를 떠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놀루루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배삯 28달러를 구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증언도 있다.


 

 

쌀값은 고국보다 비쌌고 고기값도 비싸서 그들은 밀가루로 생활하려했으나 빵굽는 법을 몰라 중국인 요리사에게 배울 때까지 곤란을 겪었다. 비싼 채소 값을 해결하기 위해 와이와루아의 카후쿠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은 채소를 직접 길러 먹었다. 하지만 죽어라 일하고 받는 월급 16달러 가운데 생활비 12달러 55센트를 빼면 남는 게 없었다. 우리는 희망을 잃었다. 우리가 공부를 하려면 먹는 것을 포기해야했고 고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배삯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하와이 한인 이민 1-그들의 삶의 애환과 승리, 웨인 패터슨 지음, 정대화 옮김

 

심영신 지사라고 해서 특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심 지사를 비롯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돕고 고국의 애국지사 가족들을 도왔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삶을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 발자취라고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그러나 고국에서 자료조사를 하지 않고 하와이땅을 밟는다면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기 어려운 게 하와이의 현실이다.  지금의 하와이에서 100년전의 흔적을 찾아 본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하와이는 초기 이민땅으로 그 역사가 깊을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역사에 깊이 관여했던 곳이므로

독립의 역사를 알 수있는 자료관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독립의 발자취를 남겨 놓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그 발자취를 기록해 놓고 기념관이라도 만들어 놓는다면 후손들의 정신적 토양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하와이에서 말없이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의 숭고한 삶의 흔적을 더듬으며 기자라도 한줄의 기록을 남긴다면 언젠가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낭만만을 즐기는 철없는 후손들의 마음을 움직일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풀만 무성한 와이파후의 사탕수수 밭에서 서성여보았다.


 이번에 하와이에서 취재한 전수산 지사, 황마리아 지사, 심영신 지사, 박신애 지사 등 하와이 출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7월 발간 예정)에 실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