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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 중국내 항일여론을 쥐고 흔든 신언준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신언준 (1904~1938) 선생은 평남 평원(平原) 사람으로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영문전수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영송국립정치대학(英淞國立政治大學) 법률과 및 동영대학(東英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발기하고, 상해(上海)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의 집행위원과 동 수보위원(修補委員)으로 활동하면서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요인인 안창호(安昌浩)가 중국의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할 때 이를 보좌하여 교섭 및 서무와 중국어·영어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흥사단(興士團)의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는 문서작성을 담당하는 한편, 흥사단 제17차 원동대회(遠東大會) (1931. 1. 7)에서는 연사로 강연하였고, 동년 6월 7일 여운형(呂運亨)이 단장이었던 상해교민단의사회(上海僑民團議事會)에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학감으로 당선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자녀교육을 맡았다.


 1929년 1월 1일 이래로 동아일보에 재직중 상해와 남경 특파원으로 뽑혀 프랑스 조계내에 거주하면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상황과 그 밖에 독립운동상황을 국내외에 홍보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하였으며 중국의 각 신문이나 잡지 등에 독립운동에 관한 논설을 자주 실었다.



1931년 7월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일어나자 한중(韓中) 민족간의 이간질을 유도하려는 일제의 간계를 간파하고 항일여론을 일으키는데 앞장서서 한국인에 대한 박해 등을 하지 않도록 중국정부 외교부에 교섭하였으며, 외교부장인 왕정연(王正延)을 방문하여 일본 정부에 항의하게 하는 동시에 국제연맹에 호소하며 중국신문기자들을 초청하여 회의를 열어 중국내의 항일여론을 크게 일으켰다.


1933년 상해 임시정부의 백범 김 구와 함께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와 협조하여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간부훈련단(幹部訓練團)에 한국의 애국청년들을 입교시키는 교섭을 성공시켜 독립군 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36년 신병으로 인하여 귀국하였다가 1938년 1월 20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

1929 동아일보 상해특파원으로 독립운동 홍보
1931 흥사단 제17차 원동대회 연사, 상해 인성학교 학감
1933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청년 입교시켜 독립군 양성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