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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엄마네 집의 “고독을 위한 의자” / 구순희

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6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 그래, /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 여럿 속의 삶을 / 더 잘 살아내기 위해 /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이 시는 한국의 유명한 시인 이해인 수녀님이 쓴 “고독을 위한 의자”의 몇 행이다. 엄마네 집 벽에 붙어있는 이 시를 나는 이젠 거의 외울 정도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도 거실 의자에 앉아 이 시를 읊조리며 고독을 달래고 있을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메여온다. 


당뇨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를 십여 년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시고 홀로 계신 엄마에게는 고독이라는 무서운 친구가 찾아왔다. 종가집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시부모와 증조할머니, 어린 시누이에 자기 자식 삼형제까지 모두 합하여 아홉 식솔이라는 대가정속에서 생활하시던 엄마는 어느 순간에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지게 되셨다.  


그 옛날 모진 가난으로 째지게 어려웠던 시절에도 항상 씩씩하시던 엄마가 고독 앞에서는 그만 아기가 되어버렸다. 눈물도, 서러움도 많아지셨다. 이제는 우리 자식들이 늙으신 엄마 곁을 지켜드려야 하는데 두 동생은 외국에 나가있으니 바랄 수 없고 나 또한 회사일에, 딸아이의 대학입시준비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 엄마 보러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엄마의 한껏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고독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단다. 독서를 즐기는 엄마가 이해인의 시를 읽으셨던 거다. 시 한편이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엄마는 또 다시 씩씩해지셨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활기로 차 넘치던 예전 엄마의 모습을 되찾으셨다.  


우선 거실 벽 정중앙에 “고독을 위한 의자”를 곱게 써서 붙여놓고 여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셨다. 엄마에게 고독을 잊게 해 줄, 이겨내게 해줄 “의자”가 생긴 것이다. 다음은 그날 해야 할 일을 계획 하시고, 남한테 방해받지 않는 본인만의 시간을 가지실거라고 하셨다. 



독서는 엄마가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제일 큰 취미생활이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엄마의 일생은 책 읽는 재미로 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마의 책사랑은 대단하셨다. 대가정속에서 항상 바쁜 일상에 부대끼면서도, 한 번도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으셨다.  


낮에는 밭일을 나가시고 밤에는 가마니틀에 앉아 여러 식구들 끼니걱정을 해야 했던 고난의 시절에도 어두운 촛불 밑에서 오스뜨롭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를 상기된 얼굴로 읽으시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시내암이 쓴 ⟪수호전⟫도 나는 엄마와 함께 밤을 패가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녘이 희붐히 밝아 올 때까지,


“…하회를 보라”에 이끌려서… 


요즘 엄마는 독서와 힘께 필기를 시작하셨다. 필기장과 만년필을 선물해 드렸더니 매일 돋보기를 끼고 독서를 하시다가도 좋은 글귀를 읽게 되면 필기장에 곱게 메모해 두셨다가 수시로 우리한테 보내주신다. 얼마 전에도 좋은 글 하나를 보내오셨다. 


“…함께하는 순간에도 서로 거리를 두고, 하늘의 바람이 그대 둘 사이에서 춤추게 하십시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되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십시오. 마치 기타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에 함께 떨릴지라도,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사원의 기둥이 서로 떨어져 있듯이, 참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아래서는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 글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중 “결혼에 대하여”라는 글 중에 수록된 내용이었다. 결혼생활에도 지혜가 필요한 법, 한 가정에서 조금은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안해가 되어 가정의 화목을 이끌어가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글귀였다. 


엄마의 손을 거쳐 쉼 없이 전달되는 좋은 글귀들과 희망의 메시지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책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나에게, 무언가에 대해 생각 하고 감명 받는 시간조차 없이 살아오던 나에게, 말라가는 화분에 생명수를 부어주듯 바쁜 일상에 치여 영혼이 메마르지 않도록 늘 묵묵히 자양분을 보태여 주었다.  


엄마의 취미는 이뿐만이 아니다. 자식들한테서 일어나는 매 하나의 일들을 체크하고 빠짐없이 축복해 주시는 일, 티비에서 방영되는 “건강상식”프로그램을 열심히 보시고 식재료를 구입하여 몸에 좋은 것들을 손수 만들어 주시는 일, 새롭게 도전한 십자수 놓기 등 다양하다.  


한땀 한땀 이쁘게 수놓은 십자수시계는 남편 잃고 힘들게 사는 막내 고모네 새집에 걸려있고 원앙방석은 우리 부부에게, 입시공부 하는 손녀에게는 “붕정만리(鹏程万里)”라는 글과 함께 다섯 필의 달리는 말을 수놓은 근사한 작품을 선물하셨다. 십자수를 받아 든 딸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작업실에 걸어 두고 사람들한테 “이거 우리 할머니 작품이야~”라고 자랑 할 거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고 당신 손녀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는 너무도 행복해 하셨다.  


엄마의 “고독을 위한 의자”, 그곳에서 탄생하는 매 하나의 소중한 결과물들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마의 정성이고 넘치는 사랑이다.  


엄마는 금년에 팔십에 들어선 힘없는 노인이지만 나한테는 변함없는 행동으로 삶의 지혜를 깨우쳐준 인생 선배였고 롤모델이였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식들 곁을 철옹성같이 지켜주시는 엄마가 곁에 있어서, 나는 마음이 항상 든든하다. 끝없는 열정과 지혜로운 마인드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계신 엄마에게, 고독은 이제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한수의 시와 함께 엄마네 집에 놓여 있는 “고독을 위한 의자”, 오늘도 엄마는 그 의자에 앉아 로년을 즐기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멋지게 수놓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