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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문익점, 목화씨를 훔쳐오지 않았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57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익점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중간 줄임) 중국의 승려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緜)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태조실록7(1398) 613문익점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를 보면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훔쳐왔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기록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라고 되어 있지요. 또 그때 원나라에는 목화가 널려 있어 금수(禁輸) 품목이 아니었다는 점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훔쳐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의 태조실록기록을 보더라도 중국 승려가 조선에서 목면을 보고는 기뻐 울기까지 했다는 것은 당시 목화가 금수 품목이 아니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조선 때 품종은 좀 다르지만 이미 우리나라에는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으며, 동아시아 최고의 옷감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익점의 목화씨보다도 800년이나 앞선 백제면이 발굴되기도 했지요. 따라서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을 영웅화하기 위하여 목화씨를 훔쳐온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