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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투쟁가 박열과 부인 가네코 후미코

[맛있는 일본 이야기 408]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는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한 박열(1902~1974)이 쓴 시다. 박열은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인물로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박열의 주인공이다.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독립운동가 박열보다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 1903~1926)가 더 돋보인다고 말이다. 후미코는 박열의 이 시에 반했다고 하지만 함께 무정부주의 사상을 공감하는 동지로서의 매력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연인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과 동거를 시작하며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한다. 경북 상주 출신인 박열은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당시 3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그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간다. 박열은 19224월 정태성 등 동지 16명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악질적인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천황을 비롯하여 황족과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의 실현을 위해 폭탄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동지 김중한을 보내다가 잡히고 만다. 이에 19263월 폭살계획으로 일본 대심원에서 후미코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박열은 19264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여 년간 옥고를 치른다.

 

한편 후미코는 사형 언도 뒤 '은사(恩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722일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공식적으로는 '목매달아 죽었다'고 하나 일설에는 '타살 의혹'이 있다. 후지와라레이코(藤原麗子)<문경에서, 2017>라는 글에서 당시 후미코가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따른다고 했다. 물론 다음과 같은 후미코의 단단한 각오의 글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죽어서 그 뜻을 부군 박열에게 바치고 조선땅에 내 뼈를 묻음으로써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친다면 그 뜻을 언젠가 누구라도 알아주게 될 것이 아닌가?”


 

박열의 부인으로 23살의 나이에 삶을 마감한 후미코의 주검을 박열의 형이 인수받으러 갔으나 유족에게 주지 않고 한국의 경찰서로 보내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되었다. 무정부주의자인 조선인 박열을 사랑한 후미코는 가고, 박열은 20여 년 동안의 감옥 생활 끝에 풀려나 194610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여 초대회장으로 취임한다. 이듬해는 장의숙과 재혼하여 조국으로 귀환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화된 가네코 후미코(21)와 박열(22) 두 청춘의 삶은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으로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주제지만, 그래서 더 일시적인 관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