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평생을 웃어야 하는 나의 사람됨
온갖 비방 불러서 허물이 잦다
외로운 학인양 나라 지킬 수 없는 재주
소나무도 말이 없다 할 말 있으랴
겨우 3년 동안의 녹이라는 자리
백일도 아니 되는 도총섭 업무
벼슬이란 원래 자연과 맞지 않는 것
급히 날리는 석장 산중으로 가리라
이는 백곡대사(白谷大師, ? ~ 1680)가 남한산성 도총섭 자리를 맡았다가 얼마되지 않아 그만 둔 뒤 지은 노래다. 현종4년(1663) 서울 도성 안의 승려를 성 밖으로 쫓아내고 절에 소속된 재산을 몰수하며 승려를 환속 시키는 것에 대해 백곡대사는 전국의 승려를 대표하여 그의 부당성을 상소했다. 그것이 『백곡집』에 남아있는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다. 이 간폐석교소는 8만여 자에 이르는 상소다.
현종은 어린 두 공주를 잃게 되자 봉국사를 짓게 했는데 이 절의 <봉국사신창기(奉國寺新創記)>를 백곡대사가 부탁한 것을 보면 현종이 백곡대사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다.
중은 말 한필 갑옷 입었고
술 실은 조각배에 재상님 오셨네
포구의 석양은 까마귀 몰아가고
바다 끝 가을빛은 기러기 가져오네
시 한편 마치기도 전에 서로 이별
만날 기약 아득하여 또 다시 드는 한잔
사미승 보내 물어보는 안부
시름겨워 바라보는 고향 누대.
백곡대사는 18살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출가한 뒤 한양으로 와 여러 명사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 가운데는 신익성이 있었는데 그에게 경사(經史)를 배웠고 그의 아들 계량(季良)과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당송 제가의 시문을 두루 배웠다. 다음은 유가의 스승 신익성이 작고한 뒤 지은 시다.
스승님 댁에서 통곡하는 울음
누가 백세의 스승 되야하나
지난날 지기였던 즐거움도
오늘은 모두가 슬픔만 간직
상에 가득한 시서의 책
옷깃 적셔 내리는 눈물
삶과 죽음 참으로 멀리 막혀
부질없이 팔애(八哀)시만 외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