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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나의 첫 도전, 과일장수 / 김정애

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11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연길로 이사 온 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어느 날 나는 집식구들과 함께 시장을 돌아보았다. 시장골목에서 사과를 보던 아들이 엄마! 사과 사줘!”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서 가져온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안배하다보니 돈을 아껴 써야 했다. 아들애가 먹겠다고 하니 사과 한 알을 사서 두 쪼각을 만들어 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과일을 팔면 어떨까애들도 원 없이 먹이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굴리면서 다음날 나는 시장에 가서 다른 사람이 과일 파는 걸 한참 지켜보았는데 잘 팔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2000원을 투자하여 시장에 매대를 산후 장사를 시작했다.

남들이 장사하는 걸 보고 쉬운 줄만 알았는데 이 일을 어쩐담? 꿈에도 생각 못하던 장사를 시작한 나는 고객이 나보고 말을 건네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면서 대답을 겨우 했다. 나는 자신에게 제발 정신 차려! 너는 두 아이의 엄마야!”라고 수없이 타일렀으나 소용없었다. 련속 며칠째 수입은커녕 본전도 못하자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까? 나의 머리에는 문뜩 일본영화에서 본 주인공 오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중국의 오신이 될 수 없을까

나는 손님들이 제일 많이 오고가는 거리에서 장사해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사과 한 가지만 가져다 사과사세요라고 외치면서 팔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나의 몸에서도 장사군 냄새가 조금씩 풍겨왔다.


한번은 거리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데 웬 남자가 내 앞에서 왔다갔다 하길래 나는 직업병이 도져서 과일 사셔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과일은 살념은 하지 않고 시물시물 웃기만 했다. 나는 속으로 별 싱거운 사람을 다 보겠네.”라고 나무람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배렬했다.

그 남자가 날 모르겠니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다시 봐도 모르겠는데 글쎄 그쪽이 하는 말이 너와 나 동창이다.”라고 하면서 이름까지 알려준다. 소학교 때 그 남학생은 키가 너무 작아서 제일 앞 책상에 앉았는데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이 남자는 풍도가 있어 보이는 중년사나이니 내가 알리 만무했다.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나는 동창생을 만나니 너무 창피스럽고 쑥스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옆에 매대 주인은 한족새댁이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늘 고객이 찾아 와서 야단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한족새댁은 다른 사람의 립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리득만 챙겼다. 그는 떨어진 포도알을 따로 봉투에 담아 놓았다가 손님이 고른 좋은 포도는 남겨놓고 이미 넣어두었던 포도알을 손님에게 넘겨주곤 했다.

집에 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손님은 너무도 화가 나서 다시 매대에 찾아왔다. 손님과 새댁은 옥신각신하고 싸움이 벌여졌는데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빙 둘러서서 나의 영업에까지 지장을 주었다. 고객과 새댁은 좀처럼 끝나지 않은 말다툼에 나는 포도와 택시비를 고객의 손에 쥐어 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나는 심심히 느꼈다. 돈은 적게 벌더라도 량심은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돈이란 본인 피땀으로 벌어야 만이 값지고 마음이 뿌듯한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돈을 더 버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남들이 쉬는 설명절에도 장사를 계속했다. 가족들은 못처럼 쉬는 날인데 집에서 푹 쉬라고 했지만 나는 못들은 척 했다. 다른 조선족언니들도 설에 장사했는데 우리들 중에서 제일 성격이 활발한 언니가 롱담이 섞인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누구를 속이는 재간도 없는데 남들이 쉴 때 장사해서 봉창하자.”

이때 버는 돈은 공짜이니 우리 이쁜 옷을 한 벌씩 사 입자.”

나도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음력설 장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효률이 높아 모두들 장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좋아했다. 나도 돈을 벌게 되니 기분이 좋아서 피곤하다는 생각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오히려 몸에서 힘이 났다.

무더운 삼복철에 남방에서 운반해 온 복숭아는 상할 때도 있었으므로 트럭에 올라가 물품을 골라야 했다. 구입한 복숭아는 겉에 붙은 털을 터는 작업을 했는데 털이 몸에 매달려 찔러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복숭아는 서민들이 즐겨 사는 과일이므로 특별히 잘 팔렸다. 10년이라는 세월 맑은 날 굿은 날 가리지 않고 매일 도매시장을 드나들면서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믿고 찾아주는 단골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과일을 팔면서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과일장사는 나에게 많은걸 선물했다. 나는 도전하는 것을 배웠고 고생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되였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니 과일장사는 내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건너온 징검다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