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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 파랑새 되어 무지개 위에 계신 내 아버지 -김기봉-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문의 : 02 -733-5027】


이 편지는 저승에 계신 아버지(金哲煥)의 이승 탄신 100주년을 맞아, 탄신 120주년과 순국 90주기를 맞으시는 천상에 계신 조부님(金相潤)께 하시는 말씀을 아들(金基鳳)이 받아 대필한다.》


아버지 !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배우는 말 세 마디가 “엄마, 맘마, 아빠”라고 합니다만 소자는 이승과 저승을 합하여 100년만에 생명을 주신 선친께 처음으로 불러보는 호칭입니다. 소자의 유아기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는 이름(金哲煥)만 기억합니다. 유년기는 다른 아이들에게 다 있는 아버지가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왜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날마다 왜놈 순사들의 다그침에 벌벌 떠는 어머니(驪州李氏 東連)가 매섭게 잡은 손에 끌려 남의 집 헛간이나 처마 밑에서 눈비와 냉기를 피해가며 얻어온 찬밥으로 허기를 달랜 기억밖에 없습니다.


고향 밀양군 상남면에는 숙부님(金相元), 고모님과 4촌 형제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왜놈 순사들 등살에 우리 모자(母子)를 돌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소자보다 13세위의 큰집 종형(金正煥)께서 왜놈 헌병대에 잡혀가 삼촌(叔父)행방을 토설하라고 콧대가 상하는 고문을 당하였다 합니다. 소년기에 접어들어서는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이나 학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남의 집 머슴으로 손과 발에 피멍이 들도록 일해서 끼니를 이어가는 것만이 소자의 희망이고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할아버지 김상윤

이윽고 나이 스물한 살이 되어 조모님과 백,숙모님의 주선으로 이웃 초동면에 사는 밀양박씨 선비 집 3남매 중 열여섯 살의 막내딸(朴分交)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세 식구가 가정을 꾸렸지만 왜놈들의 감시로 호랑이가 되신 숙부님 댁 더부살이로 시작하여 소자는 머슴처럼, 어머니와 아내는 식모와 찬모처럼 살아도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혼인한지 2년도 채 안되어 할머니께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셋째 아들 생사소식도 듣지 못하시고 81세를 일기로 별세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총성이 커질 때 큰집 종형께서 주신 시업농토(施業農土) 열두 마지기와 밀양군 하남면 대사동 언덕위에 초가삼간 집을 사서 어머니와 세 식구가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새살림을 차린 지 이태쯤 되었을 때 첫아들(基鳳)이 태어났습니다. 혼인한지 6년만의 경사였습니다. 50대 중반의 어머니는 더운 여름날 동네잔치 집에 다녀오시면서 손자 주려고 수건에 싸서 가슴에 숨긴 엿이 저고리에 붙어 옷을 벗을 수 없는 눈물겨운 손자사랑 일화도 있었습니다.


乙酉年 성하지절에 첫아이(基鳳)의 첫돌이 되는 날, 조국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소자는 해방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삶의 미래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열심히 쉬지 않고 농사일에 매달려서 남의 집에 밥 빌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었습니다. 해방된 다음해 봄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 떠나셨던 약산 김원봉 선생이 환국하여 하남면사무소 앞에로 강연하러 왔답니다. 그때 숙부님(金相元)께서 약산을 만나서 동생(金相潤)의 생사를 확인하니 신해년(1927년)음력10월19일 별세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합니다. 그때부터 매년 음력 10월 19일 제사를 모셔왔습니다.


그 뒤 이태나 되었을 성 싶은 丁亥年 늦은 봄에 아버지의 仲兄이시며 소자에게는 호랑이 같았던 숙부님(金相元)께서 별세 하셨습니다. 같은 해 유월에 소자는 둘째아들 기우(基宇)를 얻었습니다. 아버지 형제 5남매 중 백부님은 소자가 태어나 한 칠도 가기 전에 별세하셨다는 얘기 들었고, 아버지의 누님이신 큰고모님은 밀양박씨 문중으로 출가 하셨다는 말은 들었으나 일찍 별세하셨는지 뵌 일이 없습니다. 다만 아버님의 막내 여동생인 명주(明珠)고모는 일직손씨(一直孫氏) 문중으로 출가 하셔서 슬하에 4남매를 두셨는데 날이면 날마다 “큰일 가신 내 오라비”, “옥골선풍(玉骨仙風) 오라버니”, “신출귀몰 (神出鬼沒) 우리오빠”, 라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소자의 처남(朴作伊)은 일찍이 일본으로 가서 살고 있고, 처형(朴修交)은 이웃 상남면 창녕조씨(曺禧穆)댁으로 출가하여 살고 있었지만 장인, 장모님은 손끝 아픈 막내딸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소자의 삽짝 문 건너 집으로 이사해 오셨는데 처남 따라 일본으로 가지 못한 손녀(朴南仙)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장인어른(朴熙均)께서는 어린 외손자(基鳳)에게 천자문도 가르치고 예절도 가르치는 등 서당 훈장노릇은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장인 덕택에 아내와 처형은 언문을 익혀 이웃 혼사에 사돈지(査頓紙)도 써 주는 등 제법 유식한데 소자도 글자 한자라도 배워보고 싶었지만 농사일도 바쁘거니와 때 늦게 배운다는 게 심난하여 포기 했습니다. 그때 소자는 힘겹게 사는 살림에 처가댁 식구가 셋이나 보태져 생활이 더 곤궁하여 아내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듬해 戊子年(1948년) 장인어른께서 별세하시고 처질녀(朴南仙)도 출가시켰습니다. 그해 여름에 그동안 힘들여 모은 돈으로 같은 동네 건너 마을에 좀 넓은 집을 사서 이사하면서 장모님(金栢山)은 상남면에 사는 동서(曺禧穆)가 모시고 갔습니다. 또 한해가 바뀌어 己丑年(1949년) 초봄에는 어머니와 큰애(基鳳)가 채독증(菜毒症)에 걸려 건강이 약해진데다 초여름 어머니께서 둘째아이(基宇)를 등에 업고 나가셨다가 동네어귀 섭 다리에서 넘어지신 충격으로 앓아누우신지 달포만에 58세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하시고 몽매에도 그리던 아버지 곁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별세 하시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아버지께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시다가 왜 돌아 가셨는지 유해는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도 나지 않고 가슴만 조이고 있던 그해 여름 6.25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밀양에는 인민군이 쳐들어오지 않아 피난봇짐만 싸 둔 채로 지내다가 피난봇짐을 몽땅 도둑맞는 수난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피난민들이 국민학교 교실과 운동장에 가득 하고, 집집마다 피난민들이 헛간과 창고에서 기식해야 하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식량이 부족해 피난봇짐 싣고 왔던 소들을 도축함에 따라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두 아이의 채독증을 치료할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기도 했었습니다.


3년 동안 밀고 밀리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신묘년(1951년) 봄에는 큰아이(基鳳)가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우는 것이 비행기 소리가 나면 논둑 밑에 엎드리는 훈련으로 흙강아지가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해 늦가을에 셋째 아들(基寅)을 얻으니 명주 고모님께서는 춤을 추시며 불상한 오라버니 뒤끝이 나팔처럼 벌어졌다고 좋아라고 하셨습니다. 전쟁 중 유엔의 군사원조로 들어오는 분유 덕택에 아이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학비를 댈 수 없어 중퇴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 아버지 때문에 왜정치하에서 고초를 겪으셨던 큰집 從兄(金正煥)은 하남면장이 되어 근무하다가 이듬해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행운도 있었지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어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는 불운도 있었습니다.


그 동안 소자는 딸 셋을 더 얻어 6남매를 두어 여덟 식구 호구지책도 힘겹지만 큰애(基鳳)가 가출하여 부산공업야간고등학교에서 주경야독하는 고충을 간과할 수 없어 신축년(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즈음 가산을 정리하여 식솔들을 이끌고 부산 어느 달동네 단칸셋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일자무식꾼인 소자가 여덟 식구 생계와 여섯 아이 교육을 생각하며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후회스럽지만 속수무책으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지게꾼도, 건설현장 막노동도, 고공품 행상도, 하천에서 모래자갈 파서 리어카로 나르며 손발이 부르터서 살점이 뭉겨져도 아픈 줄 모르고 뛰고 달렸습니다. 아내도 삯바느질, 잡용품행상으로 힘을 보태고, 고등학생 중학생 아이들도 새벽 찬바람 가르는 신문배달, 문전박대 화장품행상 등으로 학비를 조달하며 살았습니다.


계묘년(1963년) 초봄에 큰애가 야간고등학교 졸업하고 기계공장에 취직해서 한숨 돌리나 했더니 반년도 안 되어 그만두고 나와서 군대에 소년병으로 지원입대 했습니다. 이유인즉 대학출신과 고졸자의 현격한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군대에서 직업군인이 되어 대학진학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정부로부터 아버지의 대일항쟁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 되었습니다. 드디어 나라가 아버지의 공을 인정해 주나보다 싶어 반갑고 고마웠지만 어려운 생활에 별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지만 중고등학교 월사금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쉽지 않는 부담인데 갑진년(1964년) 새 학기 부터 독립유공자 유족은 월사금을 면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소위 6.3사태라고 이름 지어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 굴욕 협상 반대 시위가 정점에 이른 6월3일 부산 동래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둘째(基宇)가 자치회 부회장으로 있으며 시위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 연유로 언제나 감시대상이 되어 어느 날 육군 훈련소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관계로 대학진학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고 병역 기피자로 분류되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소자가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러 큰애는 군대에서 장교가 되고, 둘째는 대학에 진학하고, 막내둥이 딸(銀玉)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이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독립유공자 유족 직업알선책으로 관할구청에서 소자를 불러 이르기를 문맹자라서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며 저를 상근 거리청소원으로 기용해 주었고, 이때부터 보훈처에서 많지는 않지만 매월 몇 천원의 생활보조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공훈이 얼마나 크고 적은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피 값이요 목숨의 대가라고 생각하니 목이 메이고 화가 치밀지만, 아버지께서는 목숨을 걸고 의로운 일에 스스로 투신하셨을 뿐만 아니라, 후손의 영화를 바라고 하신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나마도 감사한 생각이 들다가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소자가 배우지도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갖은 고초를 다 겪은 생각을 하면 또 울화가 치밀기도 했답니다.


설봉사 기적비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세째(基寅)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큰애가 결혼을 해서 손자를 얻으면서 큰애는 10여년의 군대생활을 접고 민간 기업에 초급 간부로 취직 했습니다. 둘째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지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이즈음 독립유공자 유족 복지를 위해 보훈처에서 토지를 제공하고 장기저리 주택융자를 실시하여 부산 대연동에 독립유공자 유족 집단거주 연립주택을 건립하였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부산의 달동네 단칸셋방으로 이사 온지 15년 만에 내 집에서 환갑잔치도 열게 된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후 셋째가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로 임관하고, 둘째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국립 부산대학 교수가 되어 결혼도 했습니다. 큰애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해서 해외근무와 경향각지 본,지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을 즈음 소자는 구청 청소원직에서 정년퇴임을 맞았습니다. 이때 명주고모님의 둘째아들이며 소자의 고종제(姑從弟 )인 손태곤(孫泰坤)이가 11대,12대 국회의원 재임 중에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자기 외숙부이자 내 아버지의 행적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효를 얻지 못했습니다.


소자의 나이 70을 넘기면서 일취월장 성장하는 국가경제와 민주화의 시련을 딛고 펼쳐진 88서울 올림픽으로 피어난 진정한 희열을 맛보고, 장엄한 팡파레를 들으며 사생취의(捨生取義)하신 아버지를 비롯한 선열들의 혈흔(血痕)이 안전(眼前)을 가렸습니다.


제 6공화국 헌법에 근거한 상훈법 개정으로 庚午年(1990년) 말경에 나라에서는 아버지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고,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소자는 76세의 노환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병중에도 기쁜 일은 큰애가 직장에서 부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지천명에 가까운 나이를 무릎쓰고 어릴 적 그렇게 원했던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입니다.


손자가 커서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때 몰래 함께 응시해서 손자는 낙방하고 애비가 합격하는 웃지못할 사건이었습니다. 해서 아내가 큰애한테 “네놈 아들보다 내 아들이 낫구나”라는 말로 회초리를 대신했다 합니다. 큰애는 조부님 덕택에 대학 등록금도 면제받는 기쁨이 있기에 입학을 결심했다 합니다. 소자는 2년여 투병으로 연명하다 갑술년(1994년) 여름 78세로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갔으나 이승에서 효심을 다하지 못한 관계로 아버지가 계신 천상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소자가 저승으로 떠난 다음해 아이들 6남매 부부와 종질(從姪)들 몇이 합심하여 저희들 어미를 모시고 말만 들은 중국 복건성 천주 남안시 양매산 자락에 있는 설봉사를 찾아갔다합니다. 국가보훈처가 아버지의 공적서에 기록한 묘비를 찾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미 6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승려가 없을 뿐 아니라 30여년전 문화 대혁명시절 사찰의 모든 기록과 기물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주지스님의 조언을 들었다 합니다.


 부득이 하여 설봉사 경내에 아버지의 기적비를 세워 제막하려 하였으나 중국정부의 승인을 득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설봉사 다비장 앞 흙 한줌을 옥함에 담아와 어머니 묘소옆자리에 묻어 봉분을 짓고 아버지의 혼을 모신다는 환혼제(還魂祭)를 올렸다 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乙酉年(2005년) 밀양시장 및 지역 유지들과 소자의 고종제 손태곤 의원이 뜻을 모아 고향땅 상남면 기산리 대로변에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 기념비”가 건립되어 그해 단오절에 성대한 제막식을 가졌다 합니다. 그 후 고향 유지들의 뜻에 따라 매년 아버지 탄신일(10월7일) 전후 토요일에 향토 후손들에게 의열투쟁 정신을 지속적으로 선양하고,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초산제(楚山祭)“ 라 이름한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 합니다.


아이들이 소자가 하지 못한 일을 잘 한다 싶어 기쁘기도 합니다만 아이들도 조부님 유해를 봉환하지 못한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나봅니다. 기념비 제막이후 이태 만에 큰애도 직장에서 정년퇴임하고 시작한 일이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단체인 광복회 일이라 합니다.


대다수 광복회원들이 어렵고 힘겹게 사는지라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봉사할 요량으로 광복회 서울 강북구 지회장에 피선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애국애족정신을 함양하고 나라사랑 일선에 앞장서 일하면서도 조부님 유해 찾는 일을 포기할 수 없어 계사년(2014년) 1월 중순 삼형제가 둘째딸(明子)를 데리고 중국 설봉사(雪峰寺)를 다시 찾았다 합니다.


때마침 둘째(基宇)도 대학교수 정년을 맞았고, 셋째(基寅)도 해병대 대령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을 때입니다. 또한 그때 둘째사위(徐壽敎)가 영국석유회사에 근무하며 중국 주하이(珠海)시 정유공장건설공사에 장기간 근무하게 되어 부부가 함께 중국생활 하면서 중국 사람들과 친분도 쌓고 중국말도 다소 배워가며 살고 있었기에 둘째딸(明子)이 오빠들을 도울 수 있었다 합니다.


의열투쟁 기념비

1월에 간 이유는 묘비 탐색에 잡초의 장애를 없애기 위해 겨울철을 택하여 일주일간 설봉사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경내는 물론 경계 밖 산야까지 훑어 내렸답니다. 그래도 실효를 얻지 못하고 20여년전 설봉사 경내에 건립하려했던 부서진 기적비를 찾아내어 재 건립의사를 타진했답니다. 때마침 한중관계가 좋을 때라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건립되고 중국 시안(西安)에 광복군 창립지 기념물도 설립된지라 작심하고 시도해서 결국 승인을 얻었다 합니다.


석학들의 독립운동사와 조선의열단에 대한 연구논문기록물로 아버지의 행적을 찾고자 아이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얻은 자료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고향 밀양 동화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친구들과 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조선의열단 창단 주역 중, 한 번도 왜경에 피체 되지 않은 분은 김원봉 단장과 아버지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의열단 초기 의거로 밀양 폭탄 반입사건, 부산경찰서 박재혁 의사 폭탄사건, 밀양경찰서 최수봉의사 폭탄사건 상해 황포탄 다나까게이치 대장 저격사건 등 중요한 사건마다 왜경들이 아버지의 가담사실을 확인하고 수배령을 내렸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매번 기소중지라는 붉은 줄을 남겼다 합니다.


조선의열단 내부조직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김원봉, 이종암 등과 함께 5인 참모부 집단지도체제하에서 맡은 임무는 거사의 기획, 단원확충, 단원교육, 폭탄제조, 거사자금조달 등 핵심소임을 수행하셨다는 기록과 이명(異名)을 여섯이나 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왜놈들의 수배기록지에 다수 단원들의 신분은 “중인" 이라 표시하고 있는데 반해 유독 아버지의 신분만은 항상 “양반”이라고 표기된 점을 미루어 소자가 양반의 후손이기에 고통이 더 깊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乙未年(2015년) 3월 28일은 아버지께서 기획하시고 지원하셨던 김익상 의사의 상해 황포탄 다나까게이치(田中義一) 대장 저격 사건이 비록 실패는 했으나 왜놈들의 기를 꺾었던 거사 9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에 맞춰 복건성 천주 설봉사 경내에서 스님들과 아버지의 손자손부들이 함께하여 조촐한 기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합니다.


비록 아버지의 유해는 고국으로 모시지 못하였으나 손자녀들의 노력으로 아버지의 넋을 달래는 일을 마무리 하면서 100년간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부디 서운하고 불편하셨던 정 거두시고 조국의 번영을 음우해 주시기를 앙망 하옵고, 소자의 아내가 아직 이승에 있으나 저승에 오르면 함께 천상에서의 해후(邂逅)를 기약하나이다. 

                                             丁酉年(2017년)中夏 小子 哲煥 再拜

             김 기 봉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연구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서경대학교 물류대학원 석사과정 이수

 

UPS,대한통운 합작법인 부사장

광복회 서울시지부 강북구 지회장

순국선열 유족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