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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잖던 조선 선비들도 산에 올랐을까?

(서평)《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코엑스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국제도서전시회를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른 전시회는 안 보더라도 이 전시회는 꼭 봅니다. 그리고 전시회를 한 번 돌고 전시회장을 빠져나올 무렵이면, 제 손에는 대여섯 권의 책이 든 쇼핑백이 들려있습니다. 이번에 사 본 책 중에 전송열, 허경진이 엮고 옮긴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유몽인최익현 외, 돌베개)이 눈에 띕니다. 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등산장비도 제대로 없던 조선시대에 그래도 산수를 좋아하는 양반들이 산을 찾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제법 있네요.

 

이 책에는 그 중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 20군데의 기행문이 실려 있습니다. 산수기행이니 산의 품속에서만 노닐고 쓴 기행문이 많지만, 실제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기행문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면암 최익현(1833~1906)1875년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남한의 최고봉답게 중간에 날이 저물어 노숙합니다. 요즘 등산용어로 하면 비박했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데 산행날짜가 3. 27.이라 그냥 비박했다가는 얼어 죽겠지요. 최익현은 나무에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하였는데,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니 어느새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최익현이 어떻게 바다 건너 제주의 한라산을 등산하였을까요? 1873년 민씨 일족의 적폐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상소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고 하여 제주에 유배되었지요. 책을 보니 최익현처럼 유배 간 김에 근처 명산을 기행한 선비들이 많네요.

 

최익현은 그래도 유배가 풀리자마자 산행한 것인데, 유배 기간 도중에 산을 찾은 이들도 있군요. 위리안치 처분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유배 도중에 산을 찾는 것은 괜찮았던 모양이지요? 면암 최익현 선생도 대쪽 같은 선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비이지만, 전 국민이 누구나 다 아는 퇴계 이황도 산을 찾았군요. 퇴계는 풍기군수를 할 당시에 근처 소백산을 기행하고 기행문을 남겼습니다.

 

기행문을 보면 대부분 선비들은 산에서 며칠씩 머무르며 산수기행을 하였습니다. 요즘에는 교통이 발달하여 당일 산행도 많이 하고, 또 산에서 자야 할 경우라도 산장이나 대피소가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산수 기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따로 있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서? 최익현처럼 노숙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절에서 잡니다. 잠만 절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승려들을 길잡이나 가마잡이로 씁니다.

 

가마잡이? ! 가마잡이입니다. 대부분 선비들이 산수기행 하면서 가마를 타고, 정 가마 타기가 힘든 지형인 경우에나 걸어서 오릅니다. 길도 좁은 오르막길을 가마 메고 가는 사람은 얼마나 고생이겠습니까? 기행문에는 가마잡이 승려의 힘들서 내쉬는 콧숨 소리도 묘사된 글이 있습니다. 조선이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을 쓰다 보니 승려들을 자기 하인 다루듯이 하였군요. 그래서 승려들 중에는 양반들이 산수기행 하러 온다고 하면 일부러 숨어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양식이 있는 선비들은 이렇게 승려들을 부려먹으면서도 미안한 감을 가지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승려들을 부려먹는 선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과 승려를 이용해먹으면 감사는 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할 텐데, 기행문 중에는 불교를 비판하는 글이 종종 나옵니다. 오히려 퇴계 이황과 같은 대유학자는 가만히 있는데, 유학자라며 거들먹거리는 양반들이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인왕산에도 호랑이가 출몰하고 심지어는 경복궁 담장을 넘어 들어온 적도 있다는데, 이보다 더 깊은 산속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책에 보니 안석경이 쓴 치악산 기행문에 호랑이 얘기가 나오네요. 안석경이 치악산에 가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치악산 대승암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었다며 말립니다.

 

그러나 안석경은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반드시 사람이 사람됨의 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며 치악산 산행을 강행합니다. 다행히 한 승려와 함께 대승암으로 올라가면서 호랑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으나 사고는 당하지 아니합니다. 안석경이 워낙 담대한 사람이라 안석경은 호랑이 소리를 듣고는 그 소리가 얼마나 맑고 거센지 온 산이 진동했다며 여유 있게 표현하고 있네요.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1559~1623)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을 남겼습니다. 두류산이 어디냐고요? 지리산입니다. 지리산이 멀리 백두산에서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하지요. 유몽인의 기행문에서 제 눈길을 끄는 것은 천왕봉의 성모사(聖母祠)입니다. 천왕봉 갈 때마다 이곳에 성모사가 있었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실제 성모사를 목격한 글은 처음 봅니다. 유몽인의 글에 의하면 천왕봉 허리 둘레에는 판잣집들이 마치 벌집처럼 줄지어 있어, 사방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 산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한라산을 제외한 남한의 최고봉에 오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워낙 성모의 권능이 널리 알려져 있다보니 성모의 은덕을 입고자 사람들이 천왕봉까지 많이 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일로 하산할 수 없으니까, 주위 무당들의 판잣집에 묵은 것이지요. 하하! 천왕봉에 성스러운 성모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모사로 먹고 사는 판잣집들이 벌집처럼 있었다고 하니, 정말 생각지도 못하던 풍경이네요.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에 실린 기행문의 저자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정조가 신임하던 영의정 체제공입니다. 67세에 관악산 연주대까지 올랐더군요. 그런데 미수 허목 선생은83세에 연주대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그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그를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하네요. 요즘도 83세에 관악산을 오르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허목은 도가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 청사열전(淸士列傳)도 지었습니다. - 83세의 나이에도 신선처럼 걸음걸이가 나는 듯 하였나요?

 

책에 실린 산수기행문은 다 남자들의 기행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기행문 중에는 여자가 남긴 것도 있습니다. 대부분 의유당 김씨의(남씨라는 설도 있음) 관북유람일기처럼 양반집 마나님들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쓴 것이지만, 14살의 소녀 김금원이 금강산과 관동팔경, 설악산 등을 둘러보고 쓴 호동서락기라는 기행문도 있습니다. 이 기행문은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에 14살의 소녀가 관동의 명산들을 기행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지요. 자칫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김금원은 남장을 하고 여행을 하였는데, 호동서락기에는 김금원이 이렇게 여행하면서 쓴 자작시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제가 산을 좋아하고, 또 산에 대한 기록을 남기다보니, 전에도 옛 선인들이 산에 대한 글을 남겼다는 기록은 종종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선인들이 남긴 생생한 산수기행문을 20편이나 보니 무척 반갑더군요.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을 읽으면서 어떤 선비는 산에 가면서도 유학에 관한 책을 놓지 않고 있거나, 조선의 산수에 취해 여기저기서 시 한 수 짓거나, 따라오는 악공들에게 퉁소를 불게 하는 등 조선 선비들이 산을 대하는 모습과 산수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마음과 느낌을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번에도 코엑스 국제도서전을 통해서 한 건 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