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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이모네 뜨락 / 리해란

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12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이모!"

정겨운 시골집이 한눈에 들어오자 애들처럼 목청껏 웨치는 내 부름소리에 이모와 이모부가 부엌문을 왈칵 열고 급히 달려 나오신다. 어쩌다 찾아간 시골 이모네 댁, 삼십여 호되던 마을은 이제 달랑 세집뿐이다.

 

뜨락을 감싸고 있는 헐렁한 널바자*는 이제 조금씩 구부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모부가 힘이 딸려 대충 해놓은 듯한 창문의 문풍지는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채 제 구실이나 하나 싶게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 밑에는 가쯘하게* 패 놓은 장작들이 차곡차곡 곱게 쌓여져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의 환호소리와 그 구경에 신이 난 강아지와 병아리들의 요란스런 동참으로 조용하던 시골집 뜨락은 삽시간에 왁짝 끓어번졌다*.

 

동년시절, 대부분 방학시간을 나는 이곳 큰이모댁에서 보냈다. 이모네는 위로 아들 둘 아래로 딸 하나로 슬하에 이남일녀를 두셨다.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읜 내가 혹 주눅이라도 들까봐 이모는 나를 각별히 아껴 주셨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사촌언니가 엄청 질투할 정도로

 

열두 살쯤 될 때의 일로 기억된다. 마을에 보따리옷장수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그 시절농촌에는 현금이 남아도는 집이 적었으므로 현금 대신 쌀이랑 콩으로 옷을 바꿀 수 있었다. 때로는 옷값을 가을에 다시 받으러 오기도 했다.

 

옷장수아주머니가 이모네 뜨락에 한가득 널어놓은 옷들은 우리의 맘을 확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모는 이것저것 들춰내어 구경은 하시면서도 딱히 우리한테 사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떼질*로는 안 통하는 이모인줄 잘 알기에 나와 언니는 그저 잠자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적이 생겨서 이모가 옷 사줄 맘이 생기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옷장수아주머니는 기나긴 설복 끝에 조금 샐쭉해진 얼굴로 풀었던 보따리를 다시 꿍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모가 오이랭국 해놓고 점심을 먹자고 하신다. 내 맘에 꼭 드는 하늘색 적삼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나는 도저히 오이랭국을 제대로 넘길 수 없었다. 괜히 심통이 나서 혹시 내가 기분 나쁜걸 이모가 눈치 못 채기라도 하실까 얼굴에 불쾌함을 한껏 그려올렸다*. 그렇게 점심을 먹는둥마는둥 하고 나는 아예 구석진 곳을 찾아서 드러누워 버렸다.

 

, 사라져간 내 하늘색 적삼이여~ 그때 나는 이모가 옷을 언니는 못 사줘도 나한테는 당연히 사줘야 하는 줄 알았다.

 

잠결에 이모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옷장수를 찾으러 앞마을에 가자시면서혹시 꿈이 아닌지 눈을 비벼대며 나는 한참 동안이나 상황판단을 위해 뇌세포를 혹사시켜야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모부가 이모를 극력 설복해서 이모가 량식고생*할 각오를 하고서 맘을 바꾼 거였다.

 

언니 하나 나 하나 새옷 사 입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행복이란 별다른 거창한 게 아니라 바로 그때 내가 느꼈던 그런 감정이리라. 천하를 다 얻은 듯한, 이제 더 이상은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는 그런 깊은 만족감!

 

어느 하루. 언니와 나는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경로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니, 저게 머야?"

"참외다."

"와 맛있겠다."

"먹고 싶어?"

"."

"그럼 사람도 없는데 가만히 뜯어 먹을까?"

"그래도 돼? 도적질 아니야?"

, 하나만 뜯어 먹자. 저리 많은데서 하나만 먹는 건 괜찮을걸."졸고있던 참외,

"그럼 언니가 뜯어. 난 옆에서 볼게.“


   

거창한 토론 끝에 우리는 겨우 용기를 내서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참외밭 속으로까지 살금살금 접근했다. 맛있어 보이는 참외 하나를 골라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정말로 옛말처럼 어디선가 도깨비 같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그리고는 더위에 끄덕끄덕 졸고 있던 참외들이 모조리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로 크게 호통을 치셨다.

 

"!“

 

혼비백산한 언니와 나는 미처 큰길로 내려오지도 못 한채 냅다 산길로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따라와서 목덜미를 잡는 것 같아 숨 돌릴 새도 없이 내처 뛰고 또 뛰었다. 헐레벌떡 겨우 집에 도착해서 보니 장단지가 가시풀에 얼기설기 긁혀 있었고 어깨는 무언 가에게 쏘여서 뻘겋게 독이 올라 있었다.

 

며칠 후 언니와 내가 뜨락에서 놀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참외를 한 가방 가득 들고서 이모네 집에 찾아오셨다. 이모부랑은 잘 아는 사이 같았다. 경로원 원장님이신데 애들이 참외를 먹고 싶어 할 거라며 호탕하게 껄걸 웃으시었다. 어안이 벙벙해하시는 이모부한테 우리는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꼬마도적들의 비밀은 그렇게 며칠도 못 가고 탄로 나고 말았다. 그날 원장할아버지는 언니를 알아보고 잘 익은 걸로 골라 따주려고 우리를 불렀는데 우리가 냅다 뛰는 바람에 이렇게 직접 가져왔다고 하셨다.

 

우리를 우주로부터 다른 세상으로 실어 나르느라 바빠서 시간은 단 일분일초도 편히 쉬지를 못한 다. 그렇게 열심히 시간이 흘러 내 앞의 장작 들고 개 쫓는 이모는 이제 칠십대 할머니이시다.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깨닫게 해주신 이모와 이모부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세월이 억수로 흘러 우리 모두가 사라진 뒤에도 내가 뛰놀던 이모네 뜨락에 그대로 남아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꼬드길 것이다. 결국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으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리라.

 

편집자 주

* 널바자 : 널빤지로 만든 울타리 = +바자

(널빤지 > 널판지 > ) = 넓게 켠 나뭇조각

바자 = ,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는 물건또는 그 울타리

 

* 가쯘하게 : 가지런하게= 층이 나지 않고 나란하거나 고르다

* 끓어번졌다 : '정열이 끓어오른다' 처럼 어떤 감정이 강하게 솟아나는 것을 <끓는다>라고 한다. 그리고 '유행이 번지다'처럼 무언가 차차 퍼지는 것을 <번진다>라고 한다. 이 두 낱말이 합쳐져서 생긴 말! <끓는다 + 번지다> =끓어번지다 = 어떤 심리 현상이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몹시 설레어 움직이다.

* 떼질 = 마구 떼를 쓰는 짓.

* 꿍지다 = 마구 동이거나 묶거나 또는 싸다. 되는대로 구겨서 뭉그리다.

* 그려올렸다 / 그려서 올리다

* 적삼 = 윗도리에 입는 홑옷. 모양은 저고리와 같다.

* 량식고생 / 식량난 = 식량이 모자라서 생기는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