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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주둔지 백산성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안과 정읍을 흐르는 동진강이 감싸고 있는 야산인 백산은 '산'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작은 '언덕'이다.  그 높이는 해발 47.4m. 그러나 이곳은 부안 정읍 김제에 이르는 인근의 평야지역세서 보면 우뚝 솟은 산으로, 백제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산위에 올라보면 주변이 다 보이는 곳이다. 이에 백산성에는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도 발견되고 있으며,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는 백제 부흥을 위하여 일본에 있던 부여( 扶餘) 왕자 풍(豊)을 새롭게 왕으로 모시고 백제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일본에서 온 구원병들과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에도 요충지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런 유서깊은 요충지 백산성은 조선 후기 고종 31년(1994년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전열은 재정비하며 혁명의 불길을 당긴 곳으로 민중들의 한이 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 동학군들이 1만여명 모여들어 백산에는 흰옷을 입은 동학군들로 빼곡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란 고작 긴 대나무를 끝만 뾰족하게 깎아만든 죽창들이 대부분이어서, 동학군이 일어서면 흰옷이 드러나 흰산(白山)이 되고, 이들이 앉으면 흰옷보다는 대나무 죽창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죽산(竹山)이 되었다고 하여,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평생 뼈빠지게 일을 하고도 농사를 지은 농만들은 먹을 것이 없이 허덕이며 살던 조선말 백성들은 백성의 뼈골을 빼먹는데는 귀신 같은 조병갑 고부군수의 유별난 탐욕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게 고부군에서 들고 일어나자, 조선내 다른 지역들에서도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었기에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지역마다 들고 일어났고, 그렇게 모여든 농민군은 전라도 여러 지역 이곳 백산에서 처음으로 군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전봉준장군이 처음 봉기한  것은 1894년 1월 이며, 이어 2월에는 조병갑이 다시 군수로 재신임을 받자 그 다음날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관아에 수탈되어 쌓여있던 수세미(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양곡)들을 되찾아 농민들에세 돌려주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부는 자진 해산한 농민군의 주모자 및 가담자들을 찾아다니며 수색 체포하자, 이건 아니다는 이심전심이 모여서 4월에 또 다시 봉기하게 되었고,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장군들은 무장현에 모여 백성과 나라를 살리기 위한 대책으로  폐정개혁,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고 2차 봉기하였다. 이곳 백산에 전라도 각지에서 모여든 동학농민군을 집결시켜, 부안관아를 시작으로 황토현 전투에 승리한 뒤, 영광, 전주 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백산에 모여든 농민군은 그 수가 1만여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의 정부군을 상대로 싸우기 위하여 처음으로 군대다운 전열을 정비한 것이다. 지금은 비록 산 가운데 최근에 지은 팔각정만이 있고, 옛 동학농민군이 기병한 창의비만이 옛날을 증언하고 있지만, 한국민이 나라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최초로 스스로 일어난 곳이라는 뜻깊은 역사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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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