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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고부군은 사라졌지만 고부향교만은 남아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학혁명의 발상지였던 고부군에 있던 향교이다. 조선조에는 국가에서 세운 공공교육기관으로 전국의 군에는 향교를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고부군에도 향교가 있었고, 그 고을의 이름을 따라 '고부향교'라 불렀다.


하지만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폭정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 뒤, 고부군수 조병갑은 파면되었고, 고부군은 주변의 다른 시군으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고부군은 사라졌지만 그 이름만은 그대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부군의 중심지에 있던 고부관아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관아 바로 옆에 있던 향교는 그대로  남아있다.


유교를 국교로 삼고 통치이념과 생활철학으로 받들던 조선시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따르던 시대였지만, 조선조 말기 유학을 공부하고 따르던 많은 유생들과 선비들은 그 본래 가르침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학문적 계보와 자신의 혈연적 이해관계속에 백성들의 삶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라의 국력이 기울고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일어나게 되니, 그것이 동학혁명이다.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것은 그것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잘 살게하는 훌륭한 학문이라 하였던 것이나, 유학이 사대부 유학자들 만의 전유물이 되고, 그들만의 당파로 전락한 뒤로, 나라의 앞날도 백성들의 삶도 개선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 개혁의 기회를 모두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마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이제 다시 광복을 회복하고 오늘에 이르러 옛날 교육기관으로 역사의 유물이 되었지만 쓸쓸한 향교 경내를 돌아보며, 공자 맹자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유학에서 근본으로 삼았던 충(忠) 효(孝)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오늘날 어찌 적용해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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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