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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누나와 여동생 덕분에 출세한 한확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8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양주 마재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로서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요즈음 남양주시가 다산을 남양주를 대표하는 역사인물로 집중적으로 띄우고 있지요. 그래서 마재마을에 실학박물관도 만들고 다산에 관련된 학회, 축제 등 다양한 행사도 펼치고 있구요. 그런가 하면 둘레길이 유행하면서 다산길도 만들었네요. 요즈음은 마재마을에 다산생태공원도 들어서 주말에는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 한확 이야기 한다면서 뚱딴지 같이 왜 다산 이야기 하냐고 하시겠군요. 마재마을 입구에 세조 때 좌의정 한확(1400 ~ 1456)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습니다. 저는 마재마을 가면서 여기에 한확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았더니 한확에게는 누나 덕분에 출세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네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잠깐 풀어보겠습니다.

 

태종 때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합니다. 고려 때 원나라의 요구로 많은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명나라 때까지도 이런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군요. 사실 영락제의 어머니는 원나라 때의 조선 공녀 출신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여진족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락제는 많은 한족 환관들을 쫒아내고, 조선에 공녀와 환관을 요구하여 조선인 공녀와 환관으로 궁궐을 채웠습니다. 영락제 이후에도 조선 공녀들이 명나라 궁궐을 차지했고, 영락제의 손자인 선종 선덕제는 조선 공녀 출신인 오황후로부터 명의 7대 황제 경제를 낳기까지 합니다. 이후 황제들도 조선 공녀를 후비로 삼았다고 하구요.

 

원나라 때야 고려가 패전국가로 할 수 없이 공녀를 바쳐야 했다지만, 한창 패기만만해야 할 신생국가 조선이 명나라의 공녀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었나요? 하여튼 한확의 누나도 이때 공녀로 명나라에 끌려갔는데, 한확이 공녀들을 호송합니다. 그리고 영락제는 한확의 누나가 마음에 들었던지 여비(麗妃)로 책봉하고, 남동생 한확에게는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내립니다. 한확의 누나가 여비로 책봉되고 한확에게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는데, 명나라 눈치를 보는 조선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때부터 한확은 조선에서도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얘기가 여기에서 끝났으면, ~ ‘명나라가 공녀를 요구한다고, 조선이 그것 하나 거부 못하냐?’ 하며 비분강개를 하거나, ‘한확이라는 녀석이 비굴하게도 그런 누나 덕을 보았구나.’ 하는 정도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이야기가 황당합니다. 영락제가 죽었을 때, 영락제는 혼자 저승 가기가 외로웠던지 자신을 섬기던 궁녀들을 데리고 갑니다. 순장(殉葬)을 하였다는 것이지요.

 

아니 고대국가에나 있었던 순장이 15세기 왕조에서도 있었다니요??? 조폭 출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이다보니 순장이 다시 부활했나요? 그런데 명나라는 이민족 출신 공녀 30여 명을 순장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궁녀들을 가릴 것 없이 순장하면 반발이 심할까봐, 이민족 출신 공녀들만 순장한 건가요? 아니면 영락제가 총애하던 공녀들만 순장한 건가? 어쨌거나 여비를 순장하였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입에선 이런 XXX!" 하는 욕이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이어지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번에는 한확에게 이런 쥐XX 같은 놈!”하는 욕이 튀어나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후 명나라 선덕제도 공녀를 요구하자, 한확은 이번에도 자기 여동생 한계란을 공녀로 보냅니다. 설사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여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좋아할 조선의 여인이 그 누가 있을까요? 한계란은 이 소식을 듣고 앓아눕습니다.

 

그리고 오빠 한확이 약을 건네주자, 한계란은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하며, 그 동안 시집갈 준비를 위해 차곡차곡 준비하여 두었던 혼수품을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한계란은 명나라로 끌려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언니가 순장당한 것을 알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한계란이 명나라 가는 것을 생송장(生送葬)이라고 하며 슬퍼하였답니다. 다행히 한계란은 선덕제의 후궁 공신태비가 되고 언니와 달리 7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고 합니다.


 

하여튼 한확은 누나와 여동생을 팔아 출세를 하였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후 한확은 좌의정까지 출세하였고, 세조의 쿠데타에도 참가하여 좌익공신으로 책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조가 한확의 딸을 맏며느리(의경세자의 아내)- 나중에 인수대비가 됩니다 - 삼아 서원부원군에까지 봉해집니다.

 

이제 한확의 신도비와 무덤을 돌아봅니다. 다른 무덤은 없고 한확의 무덤만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도비는 다른 사람들의 신도비보다 유난히 큰 데, 중국에서 배와 코끼리로 운반해 왔다고 하네요. 마재마을을 포함한 이곳을 능내리(陵內里)라고 하는데, 한확의 무덤이 왕의 능처럼 크고 웅장하여, 능 안쪽의 마을이라고 능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수가들은 한확의 무덤이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양(牡蘭半開形)’의 명당이라 후손이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합니다. 글쎄요... 한확 자신이나 그의 후손이 부귀영화를 누리면 뭐합니까? 그게 다 자신의 누나와 여동생을 팔아서 얻은 것인데요. ~~~ 이거~ 제가 임금의 장인에게 -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는 나중에 덕종으로 추증됩니다 - 너무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었나요? 글쎄요... 그래도 저는 낯선 이국땅에서 외롭게 죽어간 그의 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네요.

 

이제 저는 한확 선생의 무덤가를 떠나 다산길 2코스를 걷습니다. 걸어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 한확 선생의 무덤을 쳐다봅니다. “한확 선생이여! 당시 약소국 조선의 신하로서 선생도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겠지요. 제가 흥분하여 결례를 했는데, 너그러이 용서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