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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 불교계의 큰별이 된 ‘여대남’

[맛있는 일본이야기 41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탈진 돌길로 높은 한산 나 홀로 올라가니(獨上寒山石逕斜)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외딴 집 하나 있네(白雲生處有人家)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定車坐愛楓林晩)

서릿발 단풍잎이 매화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13살짜리 어린 소년은 당나라 두목(杜牧, 830~852)의 시를 줄줄 읊었다. 죽음에 앞서 이 시 한수로 목숨을 건진 소년의 이름은 여대남(余大男, 1580~1659)이다. 여대남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에게 잡혀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여대남은 죽기 직전, 붓을 달라고 해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달필로 써내려갔다.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년의 비범함에 죽이려던 것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데려가 자신의 스승인 일진(日眞) 스님에게 출가 시켜 승려의 길을 걷게 한다.

 

소년시절부터 영특했던 여대남은 일본 최고의 불교학당인 교토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공부 한 뒤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 등을 거쳐 1609년에 29살의 나이로 구마모토의 고찰인 혼묘지(本妙寺)3대 주지가 된다. 일요상인(日遙上人), 고려일요(高麗日遙)라는 이름으로 일본 불교계의 고승으로 활약한 여대남이지만 고국에 계신 부모님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한편 조선 땅에서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 여천갑(余天甲)은 아들과 헤어질 때 나이가 40살이었다. 그는 일본 땅으로 끌려간 아들의 소식을 가까스로 듣고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일본 땅에서 스님이 된 여대남은 꿈에서 그리던 아버지 편지를 받고 귀국을 꿈꿨으나 끝내 고국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대남은 아버지와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가 훗날 혼묘사에서 발견되어 20032KBS 역사스페셜에 임진왜란 포로 추적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으로 13살 어린 소년이 조선 땅을 떠나 일본에서 고승으로 불교계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삶을 어찌 필설로 다 기록할 수 있을까? 여대남은 1659년 입적하기 8년 전부터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長崎県島原市)의 고코쿠지(護國寺) 주지를 맡아 불교의 중흥에 힘쓰다가 입적할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