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계동, 가회동, 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라고 미친 듯 소리 질렀다고 하지요.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 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 손문(孫文) 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또 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하여 통일된 최고기관 곧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지요. 그리고 1919년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 정부수립을 추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수립 뒤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ㆍ출세욕 등이 뒤엉켜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지요.
그러자 선생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단식한 끝에 삶을 끝내게 됩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민영환처럼 자결하려 했으나 죽지 못하고 한쪽 눈이 멀었습니다. 이때 거울을 본 선생은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