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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1922년 오늘, 한국혼 외친 신규식 독립지사 순국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5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이 남긴 명저 한국혼(韓國魂)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선생은 1879113일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습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계동, 가회동, 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라고 미친 듯 소리 질렀다고 하지요.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 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 손문(孫文) 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또 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하여 통일된 최고기관 곧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지요. 그리고 1919년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 정부수립을 추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수립 뒤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지요.

 

그러자 선생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단식한 끝에 삶을 끝내게 됩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민영환처럼 자결하려 했으나 죽지 못하고 한쪽 눈이 멀었습니다. 이때 거울을 본 선생은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