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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일본에 가 당대 으뜸 서예가가 된 ‘홍호연’

[맛있는 일본이야기 41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경남 산청 출신의 홍호연(洪浩然)은 임진왜란 때 12살의 나이로 왜군에 납치되어 나고야 일대에 살면서 명필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 , 7만 명을 학살한 뒤 경남 내륙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때 경남 산청에 살던 호연의 가족인 남양 홍 씨 일가는 마을 뒷산 동굴로 피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어린 소년은 가족들과 헤어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부대에 붙잡혀 일본 규수(九州) 사가(佐賀)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 뒤 12살의 어린 소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호연은 나카노진우에몬(中野左衛門)에게 맡겨져 사무라이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부터 글공부를 하면서 익힌 붓글씨 솜씨는 사무라이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 어린 호연은 워낙 천재적인 소질도 있었던 데다가 목숨을 지켜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서예에 몰두한 끝에 혹부리 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이루면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찬사를 받는다.


교토시의 초호지(頂法寺) 현판은 물론 사가시(佐賀市)의 신사(神社)등에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로 활약한 홍호연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76살의 나이로 일본땅에서 눈을 감는다. 홍호연의 12대손 고우 요시로(洪悅郞) 씨는 가문 대대로 전해지던 조상의 유품을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에 기증하면서 홍호연의 사연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1011월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나고야성 박물관과 함께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교류전을 열면서 홍호연의 유작들은 한국으로 돌아 왔다. 일본 전역에 살던 그의 후손들도 한국에 와서 경남 산청의 남양 홍씨 일가와 가족 상봉을 했다. 홍호연이 소년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지 417년 만의 귀향이었다. 20144월에는 홍호연 선생의 고향인 경남 산청군 오부면 중촌에 송덕비도 세웠다.



 

송덕비를 세우던 날은 일본의 후손 20여명도 참석하여 송덕비 제막식 참석과 고향의 선조 무덤 뫼절(참배) 등을 통해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살면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고결한 선비정신과 조국에 대한 사랑, 혈육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관한 선생의 인품을 본받기로 다짐했고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혈육의 정도 나눴다. 비록 포로로 잡혀가 고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어도 한일 사이 후손들이 모인 자리를 지하에서 보았다면 미소 짓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