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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아버지의 무덤앞에서 / 손정화

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15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어느 때부터 남편이 미안한 눈길을 보내더니 올해 한가위는 오빠와 함께 내 친정아버지의 산소에 가보자고 청들었다.(그동안 오빠와 형님 수고했어요! 해마다 잊지 않고 아빠의 산소를 찾아주셔서이 못난 동생을 용서해주세요!)

 

해마다 찾아오는 아빠의 산소지만 올해 따라 낫질하기 바쁠 정도로 이렇게 풀이 컸는가고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오빠가 낫부터 꺼내든다.

 

"아빠, 막내딸 왔어요. 아빤 그래도 이 막내딸 알아볼 수 있죠? 어릴 적 오빠와 엄마의 꽁무니를 따라 아빠의 산소를 찾아 뵌 뒤로, 시집간 딸은 친정집 산소를 찾아뵈면 나쁘다는 봉건의식에 30여년이 되도록 여태껏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뵙지 못했어요. 제가 '못 된 딸년' 맞죠?"하고 내가 입으로 주절주절 댄다. 오늘따라 아빠의 무덤 위에 꺼칠하게 자란 저 풀이 마치 길게 자란 아빠의 머리 같아 보여 오빠의 손에 쥐였던 낫을 빼앗으며 "불효한 딸"의 감투를 벗어보려고 나는 아빠의 "머리"를 다듬어본다.

 

그동안 아빠가 많이 노여워 했나보다. "머리"가 이렇게 더부룩할 정도로 자랐으니올해 따라 하늘에서 물함지가 륙속 터지는 바람에1 억세게 자란 저 풀~ 그동안 아빠가 이 막내딸 와주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을까 하는 생각에 한바탕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디에서 솟구쳐 나온 맥()이었던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풀이란 한 번도 베여보지 못한 내가 쑥쑥 베는 바람에 셋이 합심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아빠의 "머리"를 제법 깔끔하게 미용해버렸다. 그렇게 꺼칠하게, 그렇게 억세게 자랐던 풀을 깨끗하게 미용해 놓고 나니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죄책감을 깨끗하게 씻어주듯 내 마음은 후련해졌다.

 

아빠의 상돌(=상석) 앞에서 오빠의 인사가 끝나자 우리 내외가 술 붓고 세 번 절하였다. "아버지, 우리 삼남매 지금처럼 화목하게 잘 살게 해주세요. 엄마는 지금도 건강하게 잘 계시고 있어요. 형님은 좀 아파서 오지 못하고 언니 네는 올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람에 거기에 갔어요. 그 대신 못난 막내딸과 막내사위 이제야 찾아와 인사드립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두서없이 말하고는 끝났나싶어 상차림을 거두려고 서둘렀다.


 

저보다 경험 많은 오빠가 산소에 와서는 인차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면서 한쪽 편에 상차림을 옮겨놓는 것이었다. 그리곤 셋이 오붓하게 앉아서 술잔이 오고갔다. 마치 아버지의 ""에 온 듯한 느낌에 마음은 편안하였다. 오빠가 따라주는 술에 아무런 사양도 없이 쭉~마셨다. 어쩐지 오래간만에 아빠집 놀러온 딸내미 인차 갈까봐 걱정되어 "오늘은 실컷 놀다가 집에 가~." 하며 측은한 눈길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술을 더욱 거나하게 마셨다. 차츰 술잔과 술잔이 마주치는 차수가 많아지니 이야기도 많아졌다. 나의 입에서는 그동안 어릴 적 쌓였던 설음이 샘솟듯 활활 솟아났다.

 

"아버지, 아버진 왜 그리 빨리 우리 세 남매를 두고 다른 세상 갔어요? 한창 꽃필 꽃나이에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억장이 무너지게 한 아버지, 오빠 7, 언니 5, 내가 겨우 두 돌 전 너무나 한심했어요!

 

내가 오늘 조금이나마 아빠 면목 떠올려 보려고 엊저녁 옛날 엄마 아빠의 흑백결혼사진을 들고 왔습니다. 세상물정 알아서 제가 처음으로 아버지와 대화하듯 풋풋한 아버지의 토종 흙냄새 맡아보며 가슴 들먹이며 아버지란 이름 불러봅니다. 아버지, 그동안 너무 일찍 아버지 없는 세월을 보내다니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게 살았는지 아십니까?

 

앞마을 집체호자리2였던 유치원에 갔다올 때면 인숙이는 아빠의 목마를 타고 깔깔 기뻐하며 집에 돌아왔지만 난 그냥 그 애 아빠의 뒤를 따르며 그 애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옥희 네 엄마와 아빠가 옥신각신 다투다가 불꽃 튕기는 사랑냉전이 벌어졌답니다. 그 애 아빠가 밸김(홧김)에 쇠가마 뚜껑을 후닥닥 다 깨버리고 깨진 조각들을 고물장에 가 팔곤 그 돈으로 자기네 오누이한테 따발사탕을 사줬다하면서 나한테 자랑하더라구요. 허기진 설음과 마음에 시달렸던 나는 왜 자식을 극진히 사랑해주는, 쇠가마 뚜껑을 부시는 아빠라도 없는가고 한탄했습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온 우린 따뜻한 엄마사랑이 세상에 하나인줄로 아버지사랑도 대체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밖에 나가선 애비 없는 자식 후레자식이라 하며 조금만 잘못해도 다른 사람들의 멸시와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집 애들은 한창 밖에 나가 재미나게 뛰놀 때면 하학하고 우리 삼남매는 엄마를 도와 돼지풀도 캐야 했고 닭모이도 쪼아야 했고 집의 "별다른 식구(또 다른 식구)"에게 먹이를 주어야 했습니다. 정말 어른 못지않게 힘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도시에 오면 고생이란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나 좋을 줄로 생각했는데 직업 없는 엄마를 도와 콕스(고체 연료)도 주어야 했고 폐철도 주어야 했으며 일요일이면 석탄도 퍼서 들여야 했고 떡장사 하는 엄마를 도와서 남들이 달콤하게 자고 있는 새벽엔 일찍 일어나 바삐바삐 떡을 하고는 땀을 식힐 새 없이 총알같이 학교로 뛰어가야 했습니다.

 

대학입시 공부 때 겨울밤, 저녁자습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희의 길목에는 추워할세라 목수건 손에 들고 자전거 밀고 마중 나온 아버지가 계셨지만 내가 홀로 집으로 가는 어두운 밤길은 기승을 부리는 칼바람과 함께 내 온몸은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집으로 뛰어가야 했습니다.

 

결혼식날 례식장에 순희의 곁에는 아쉬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손잡고 입장하는 아버지가 계셨지만 결나의 곁에는 "딸아, 잘 살어."하며 내 손 잡아주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설 명절이면 우리 집은 흥성흥성하기보다 손자, 손녀들이 세배 드릴 멋도 없는 평범한 분위기였고 외손자가 대학가도 나의 집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빨간 봉투 내밀어주시는 외할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면 세상 모든 일 해결될 듯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며 울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그 이름 아버지인데, 그토록 불러보고 싶었던 마음 든든한 그 이름 아버지인데 목이 터지게 불러 봐도 목 놓아 울어 봐도 오시지 않는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딸사랑은 아버지라는데 이 세상에 나를 낳으시고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한없이 야속하였습니다. 허지만 꿈에라도 보고 싶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딸로 태여 난 나도 남들 못지않게 바다처럼 평온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보고 누려보고 싶었건만 내 기억에도 본적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꿈에라도 한번만 단 한번이라도 마음이 고픈 이 딸을 찾아주세요! 사랑하는 내 아부지... 흑흑~"

 

나는 눈물범벅이 되여 아버지의 산소에서 소리 내여 왕왕 울었다. 옆에서 오빠와 남편이 흐느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더는 울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아무리 바람에 흔들려도 저 깊은 땅속에서도 가지를 묵묵히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