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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김수연의 소리, 이제는 국가가 지켜주어야

[국악속풀이 33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당세의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김세종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김세종제 춘향가의 미적(美的)접근>이라는 학술모임에서도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과정이나 동편소리의 특징으로 통성이나 대마디 대장단, 기교보다는 통목을 쓰는 점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전의 춘향가와는 달리, 양반적 취향이 상당부분 가미되어 사설 내용이 우아해 졌고 섬세해 졌다는 이야기나 시창(詩唱)의 삽입이나 우조(羽調)가 강하게 포함되며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는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김세종은 동편에 속한 대명창으로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아 문견이 고상하고, 문식(文識)이 넉넉하며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당세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세종은 사설의 이면(裏面)과 형용동작이 사설에 맞도록 적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김세종의 춘향가 소리를 보존해 나가고 있는 모임을 현재 김수연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김세종제의 춘향가를 김수연에게 전수해 준 스승이 얼마 전 작고한 성우향 명창이다. 성우향은 국가지정 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친 사람이다. 필자가 성우향을 처음 만난 시기는 1960년대 중반이다. 516 직후로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모 장성 댁에 초대를 받았을 때로 기억되는데, 국립국악원에서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면서 북을 잘 치시던 신은휴(申銀休) 선생이란 분을 따라 갔었다. 그곳에는 이미 소리꾼 성우향과 중년의 가야금 연주자 유대봉 명인도 함께 초대되어 와 있었던 것이다. 벌써 50년이 넘는 옛 이야기가 된다.

 

식사와 환담이 끝난 후, 우리는 자연스레 즉흥 음악회를 열었는데, 내가 피리로 상령산을 연주한 다음, 유대봉의 가야금 연주, 그리고 성우향의의 판소리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대봉 명인의 자유분방한 가야금 연주는 처음 접하는 나에게 민속음악의 또 다른 세계를 알려주었다. 또한 당시 30세 전후였던 성우향의 칼칼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 역동적인 소리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가 단국대 천안캠퍼스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1990년대였다. 학생들의 졸업연주나 정기발표회가 수시로 캠퍼스 내의 극장에서 열리곤 했는데, 성우향의 제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객석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모신 지도교수가 아니었음에도 일찍 내려와 연습과정을 지켜보며 제자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성우향에 관한 강한 인상은 제자양성이나 제자사랑에 남다른 열의를 보인 명창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익힌 성우향 명창은 판소리를 배우기 이전, 큰아버지로부터 가곡과 시조를 배웠다고 하는데, 성우향 뿐 아니라 판소리 또는 민요명창들이 그들의 주 전공 분야의 소리를 배우기 전에 가곡이며 시조창을 먼저 배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능력, 소리를 힘차게 내는 발성, 그리고 기교를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소리의 역동성을 중요한 요소로 보기 때문이겠다. 그러므로 소리꾼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소리의 멋을 쫒아가는 기교가 아니라, 소리를 바르게 내는 발성이나 소리에 적합한 창법이 기본이 된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긴 호흡과 힘찬 발성을 익혀서일까? 성우향의 기본적인 목구성이나 소리판에서 관객을 휘어잡는 창, 아니리, 발림의 표출 능력은 남다른 면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성우향의 스승이 바로 보성에서 김세종제 춘향가를 많은 제자들에게 전승시킨 정응민 사범이다. 성우향의 소리길은 그의 스승 정응민의 영향이 크다고 전해진다.


정응민은 소리꾼이면서도 선비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창이 지녀야 할, 이른바 바른 마음(正心), 정직한 소리(正音), 그리고 지나치지 않는 몸동작이나 연기를 강조해서 판소리를 즐기는 청중들이 계면(界面)성음을 원하고, 재미 위주의 소리나 너름새를 원한다고 해도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판소리꾼으로는 드물게 예술가적인 면모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응민의 판소리 관()은 성우향을 거쳐 그대로 김수연에게 이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김수연의 소리를 대하면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남다른 소리꾼의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던 실화 하나를 소개한다.



연전(年前)에 미국 UCLAKorean Music Symposium행사를 마치고, LA문화원에서 기념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전날 방송을 통해 한국에서 김수연 명창이 왔다는 소문이 펴지자, 극장은 공연 전에 벌써 만원이 되어버렸다. 입장을 못한 재미동포들의 절반은 되돌아갔고, 공연 끝나기를 기다린 일부 애호가들은 호텔로 몰려와 음반에 사인을 받아 간 사실을 목격하면서 그의 명성이 국내 못지않게 미국에도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L.A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사막 중간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의 일이다. 넓은 홀 안에 한국관광객이 꽉 들어찼는데, 주인의 간청으로 소리 한자리를 청하자, “창밖에 국화를 심고로 시작되는 <흥타령>을 불러주었다. 외국에서 우연히 듣게 된 명창의 소리에 식당안은 흥과 감동,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관광객이나 동포들도 있었다. 한국의 소리, 특히 남도소리의 멋이 무엇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연은 소리뿐이 아니라, 매사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 있는 생활태도나 주위 사람들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또한 그대로 그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승계보가 뚜렷하고, 예술적 실연 능력에 있어서도 국내 최정상급 명창으로 인정받고 있는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는 김수연 명창, 그의 연령이 이제 70을 넘고 있는 시점에서 무형문화재를 관리 보존하는 기관이나 이 업무에 종사하는 관계자, 그리고 인, 선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문화재위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제 김수연의 소리는 국가가 보호하고 지켜줄 시점이 되었다.”는 진심어린 간청이다.

 

그래서 전통의 소리가 김수연과 또한 그가 이끄는 보존회의 활동으로 더더욱 활발하게 전승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