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오죽헌ㆍ시립박물관이 한가위 연휴 기간 중 역대 하루 최대 인파를 불러들이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한가위 연휴 하루 평균 관람객이 8,718명으로, 지난해 같은 때와 견주면 139%나 늘었다고 하지요. 그 오죽헌에 가면 보물 제602호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 (李珥 手稿本 擊蒙要訣)》이 있습니다. 이 책은 율곡(1536∼1584)이 42살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해주에 있을 때 처음 글을 배우는 아동의 입문교재로 쓰기 위해 펴낸 것입니다.
이 책은 책머리에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며, 부모를 봉양하고 남을 접대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책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지요. 특히 《격몽요결》은 박세무(朴世茂)가 쓴 《동몽선습(童蒙先習)》과 함께 초학자의 입문서로 많이 읽혀져 왔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책인 《소학(小學)》과 달리 조선의 시각으로 조선의 정서와 학풍에 맞게 쓴 것이 큰 특징입니다. 또 이 《격몽요결》은 여러 차례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나왔으나, 친필본으로는 이것이 유일하여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됩니다.
율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23살 때 별시에서 장원을 한 뒤 벼슬길에 올랐고, 호조좌랑, 예조좌랑, 우부승지를 거쳐 47살 때 이조판서를 지냈습니다. 특히 그는 9번이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지요. 율곡의 성리학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임진왜란 이전 “10만양병설”을 주장할 만큼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음은 물론 그가 죽은 뒤 온나라 20여개 서원에 위패가 모셔질 정도로 큰 인물이었지요. 저서로는 《격몽요결》 외에 《성학집요》, 《기자실기》, 《만언봉사》 따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