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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아내와 남편 사이, “여보ㆍ임자ㆍ이녘”

[우리 토박이말의 속살 22]

[신한국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여보라는 낱말을 모르는 어른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라도 너덧 살만 되면 그것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부를 때에 쓰는 말인 줄을 안다. 국어사전들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서로 부르는 말이라는 풀이에 앞서 허물없는 사이의 어른들이 서로를 부르는 말이라는 풀이를 내놓고 있다. ‘여보라는 말을 요즘에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서로 부르는 말로 많이 쓰지만, 지난날에는 허물없는 사람끼리 서로 부를 적에 쓰는 말로 더욱 많이 썼기 때문이다.

 

여보는 본디 여보십시오’, ‘여봅시오’, ‘여보시오(여보세요)’, ‘여보시게’, ‘여보게’, ‘여보아라같은 낱말에서 ‘~십시오’, ‘~시오’, ‘~시오’, ‘~세요’, ‘~시게’, ‘~’, ‘~아라와 같은 씨끝을 잘라 버린 낱말이다. 그런데 여보의 본딧말인 여보십시오’, ‘여보아라따위도 애초의 본딧말은 아니다.

 

애초의 본딧말은 여기를 좀 보십시오.’여기를 좀 보아라.’ 같은 하나의 월이었다. ‘여기를 좀 보십시오.’여기를 보십시오.’로 줄어지고, 다시 여기 보십시오.’로 줄어졌다가 마침내 여보십시오.’로 줄어진 것이다. ‘눈을 돌려서 여기를 좀 바라보아 달라는 뜻의 문장이 줄어져서 마침내 사람을 부르는 낱말 여보로 탈바꿈했다는 말이다.

 

낱말로 탈바꿈한 여보의 본딧말에서 여보십시오’, ‘여봅시오’, ‘여보시오(여보세요)’ 셋은 손윗사람에게 쓰는 높임말이고, ‘여보시게’, ‘여보게’, ‘여보아라셋은 손아랫사람에게 쓰는 낮춤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는 대우를 나타내는 몫은 ‘~십시오’, ‘~시오’, ‘~시게’, ‘~아라따위의 씨끝이 맡고 있다. 그러니까 여보는 본딧말에서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는 몫의 씨끝을 잘라 버려서, 높이지도 못하고 낮추지도 못하는 말이다. 이렇게 높이지도 못하고 낮추지도 못하도록 씨끝을 잘라버린 말을 반말이라 한다.

 

듣는 사람을 높일 수도 없고 낮출 수도 없는 사이, 높이지도 못하고 낮추지도 못하는 그런 사이를 허물없는 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허물없는 사이에서 가장 허물없는 사이, 도무지 높일 수도 없고 낮출 수도 없이 평등한 사이를 우리 겨레는 아내와 남편 사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반말이란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만 쓰는 말이고, 남에게는 쓰지 못하는 말이었다.

 

아내와 남편 사이가 아닌 다른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높낮이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벗들끼리도 서로 평등하니까 반말을 쓸 수 있을 듯하지만, 아주 허물없는 벗들끼리는 서로 조금씩 낮추어서 ‘~시게또는 ‘~따위의 씨끝을 붙여 온전한 말을 쓰는 것이었고, 반말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만 쓰는 것이 우리 겨레의 말법이었다.

 

아내와 남편이 평등한 사이였음은 반말뿐 아니라, ‘부름말(호칭어)’로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쓰는 부름말은 임자였다. 알다시피 임자는 본디 물건이나 짐승 따위를 제 것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여느 이름씨 낱말이다. 요즘에는 주인이라는 한자말에 밀려서 자리를 많이 빼앗겼지만 아주 쫓겨서 사라지지는 않은 낱말이다. 그런 이름씨 낱말을 우리 겨레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부름말로 썼다.


 

아내는 남편을 임자!” 이렇게 부르고, 남편도 아내를 임자!” 이렇게 불렀다.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임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에게 매인 사람으로 여기고 상대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조금도 높낮이를 서로 달리하는 부름말을 쓰지는 않았다. 요즘 더러 아내는 남편에게 높임말을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낮춤말을 하면서 이른바 남존여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것은 지난 세기 일제 침략 기간에 남긴 일본 사람들 말법의 찌꺼기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은 가리킴말(지칭어)로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쓰는 가리킴말은 이녁’, 이녘이었다. 알다시피 은 자리를 뜻하고 은 방향을 뜻하여 꼼꼼히 따지면 서로 다르지만, 여느 쓰임에서는 서로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이녘이란 말은 이쪽과 비슷한 뜻인데,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며 이녁이라 하고, 남편도 아내를 가리키며 이녁이라 한다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상대 쪽이라면 마땅히 그녁()’, 그쪽이라 해야 올바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 겨레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서로를 가리키며 이녁이라 했다. 서로가 상대 쪽을 가리키며 자기 스스로라고 하는 셈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는 둘로 떨어지는 남남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 곧 한 사람이니 그녘으로 부를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아내와 남편은 평등할 뿐만 아니라 아예 한 사람이기에, 상대가 곧 나 스스로라고 여겼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반말을 쓰고, 서로를 한 몸 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사실에 몇 마디 더 토를 달고 싶다. 요즘 여성 인권을 드높이는 일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 겨레가 먼 옛날부터 여성을 남성보다 낮추었던 것으로 아는 사람이 더러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지난날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계집을 낮추고 사내는 높이는 그런 뜨레를 두었던 자취는 없다. 오히려 여성을 남성보다 더 높이고 더욱 아끼고 우러러보며 살았던 자취가 두드러진다. 누이는 오라버니에게 ‘~하게를 쓰도록 하면서 아우는 누나에게 결코 ‘~하게를 쓸 수 없도록 하고, 형편만 되면 딸은 아름다운 별당에서 곱게 키웠던 것을 그런 자취로 꼽을 수 있다.

 

다만, 유교 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 오백 년 동안에 남존여비로 오해받을 만한 꼬투리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런 꼬투리로 혼인 풍속내외법을 들 수 있다. 우리 겨레의 혼인 풍속에는 남편이 아내 집으로 들어가는 장가들기와 아내가 남편 집으로 들어가는 시집가기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형편에 따라 골라 썼다.

 

그런데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시집가기로만 갈수록 굳혀지니까 아들을 둔 집은 값진 일손을 얻어 오고 딸을 둔 집은 값진 일손을 넘겨주는 일방통행이 되고, 게다가 아들딸을 낳으면 또 고스란히 남편 집의 핏줄과 일손으로만 이어지게 되었다. 이래서 딸자식은 공들여 키워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내외법이란 아내와 남편이 삶의 몫을 나누어 맡는 법도를 뜻한다. 대문 안쪽 집 안에서는 아내가 다스리고, 대문 바깥세상에서는 남편이 다스리는 삶의 방식이다. 오늘날 눈에는 집 밖에서 앞장서는 남편 쪽을 높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본디 아주 평등한 역할 분담이었을 뿐이고, 사내를 높이고 계집은 낮추자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유교 철학에서 나온 이들 두 가지 풍속에도 여성을 낮추고 남성을 높이려는 뜻은 없었다는 말이다.